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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버니


감독 특별전 같은 게 아니면 한 감독의 영화 여러 편이 맥락 없이 극장에 동시에 걸리는 일은 흔치 않은데 요새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두 편이 상영중이다. [비포 미드나잇]과 [버니]. [비포 미드나잇]은 생각보다 순항 중인데 비해 [버니]는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아 이런 추세라면 금세 내려갈 듯하여 얼른 챙겨 봤다.


주연 배우가 잭 블랙이어서 감독의 전작 [스쿨 오브 락] 같은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예고편에서도 코믹함이 묻어나는데다가 매튜 매커너히가 연기하는 검사가 잭 블랙을 곤경에 빠트리는 설정인 것처럼 보였기에 한바탕 유쾌한 소동이 벌어질줄 알았다. 직접 본 영화는 기대와 좀 달랐다. 실망스러웠던 게 아니라 새롭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스토리는 무척 단순하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데 의외로(?) 드라마틱하진 않다. 매우 짧게 요약을 하자면 주인공인 버니가 사람을 죽여서 재판을 받는 이야기이다. 무슨 음모라든지 반전 같은 것 하나 없이 담백하다. 그럼에도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주연 배우들의 호연으로 영화는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된다.


이런 스토리가 영화의 한 줄기라면 다른 줄기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텍사스 주의 작은 마을과 주민들이다. 이웃들이 버니와 그의 파트너(?)였던 마조리에 대한 기억과 일화들을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을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처럼 찍었다. 물론 가짜다. 주민들이 극 중에서 연기도 하기 때문에 진짜라고 착각할 여지도 없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할 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문구를 이미 본 터라 저들이 하는 말들이 마냥 '대사'처럼 들리지 않는다. 실재과 연출 사이 어디쯤에서 지켜보는 듯한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잭 블랙과 셜레 매클레인이 끌고 가는, 잔재미와 웃음이 있지만 조금은 심심한 스토리가 이웃들의 뒷말(!) 덕분에 풍성해지기도 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진실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만든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버니를 그린 부분들도 버니 본인의 증언에 기대고 있을 테니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일반적인 영화였다면 버니에 감정이입하게 한다든지 반대로 검사의 입장에 서서 버니의 위선을 까발리는 데 열을 올렸을 텐데 [버니]는 키득거리며 보다가도 자꾸 객관적인 거리를 두게 됐다. 이것도 참 색다른 경험이었다.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유머러스하지만 버니의 재판 장면에 이르러서는 배심원제도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다른 영화 같으면 이 지점이 좀 뜬금 없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 앞부분에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같은 연출을 해 왔고 작은 마을 특유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은근히 드러냈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극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런 저런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녹이기 위한 최적의 솔루션을 이 감독은 찾은 듯하다.


다만 더 진지하게 접근해 논쟁을 일으켜 볼 만한 소재였음에도 슬쩍 건드리고 만 느낌이 드는 건 좀 아쉽다. 러닝타임이 짧기도 하거니와 드라마와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섞여 있어 주연 배우들의 존재감이랄까,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는 느낌이 약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흔히 볼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과 다른 매력의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고만고만한 블록버스터에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도 참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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