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외국으로 여행 간 꿈을 꿨다. 현지에 살고 있는 후배의 가이드를 받는 설정이었는데 꿈인 만큼 이야기는 뒤죽박죽이었다. 숙소가 게스트하우스 느낌이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그곳에 묵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소개했다. 비록 꿈이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맞닥뜨렸을 때의 묘한 긴장감이 무척 생생했다.
친구를 잠깐 만날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오려니 허전해서 [로마 위드 러브]를 봤다. 어젯 밤에 꾼 꿈도 있고 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로마에 가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날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기괴한 제목으로 개봉했던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봤을 때 바르셀로나로 바로 날아가고 싶었던 것에 비하면 참 뜨뜻미지근했다.
여행 경험이 많지 않다. 그보다는 여행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로 와서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번씩은 고향에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론가 멀리 가는 일을 굳이 더 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 컸다.
여행의 재미를 알게 된 건 한참 나이가 더 들어서였다.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 난생 처음 일본에 갔을 때였다. 아무 준비도 없이 놈이 짠 계획에 맞춰 그냥 따라 다닌 수준이었고 전형적인 관광객 루트였음에도 마냥 신났다. 관광지의 색다른 볼거리보다 다른 세상이 있구나,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신기함이 더 인상적이었던 경험이었다.
그 이후로 여행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쪽으로. 후회도 했다. 좀더 어렸을 때 많이 다닐 걸. 한 해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져 하루에 한두 곳만 다녀도 피곤해질 때 그런 생각이 특히 커졌다. 어쨌거나 국내든 국외든 '여행은 자주 갈 수록 좋은 것'이 되었다. 돈과 시간이 문제일 뿐이었다(아주 큰 문제이긴 하다).
여행 경험이 쌓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다니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다. '이게 왜 좋은 거지?' 하는. 여행 계획 세우는 것도 재미있고, 한푼이라도 싸게 교통편이나 숙소를 예약하는 것도 즐겁고, 새로운 곳을 쏘다니는 것도 흥미진진하긴 한데 그보다 더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분 좋음'의 정체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됐다. 내 경우의 결론은 '가사로부터 해방'이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도 볼거리,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많고 그걸 누리는 동안은 즐겁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만큼 감흥이 크지 않다. 그 이유가 '언제든 다시 보고 먹고 즐길 수 있어서', 그러니까 그만큼 절실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집에 돌아가면 집안 일이 날 기다리고 있겠군' 하는 생각인 것 같다.
이걸 느끼고 난 다음부터 여행에 심드렁해졌다. 물론 여행을 가기 싫어진 건 아니다.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서 벗어나 머리에든 가슴에든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좀 허무해졌달까. 여행지라 해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고 내가 머무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삶의 아주 작은 부분일 텐데 '가사로부터 해방'되어 그걸 좀 느껴보겠다고 길을 떠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싶은 거다. 오늘 [로마 위드 러브]를 본 뒤 느꼈던 미지근한 감정도 여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여행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이는 것인 만큼 가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내 여행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여행을 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