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종 : 아케이드, 드림캐스트
발매년도 : 1993년
장르 : 대전액션
제작사 : SEGA
게임의 역사를 쫓아가보면 1993년에는 굉장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게임 센터에 게임이 하나 발매된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지만요. 일본의 게임회사 세가(SEGA)에서 발매한 대전 액션 게임인 <버추어 파이터>가 발매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왜 놀라운 일인가 하면, 그 전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대부분의 게임들은 소위 ‘2D'라고 말하는, 평면적인 개념의 그래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기본이며 당연하다고 여기던 시절이죠. 물론 <어둠속의 나홀로>나 <코만치>등의 여타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CG 기술을 이용한 3D(현재의 3D 영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3차원 공간)를 사용하고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둠속의 나홀로>는 독특한 방향성에 대한 실험에 가까웠고, 비행 시뮬레이션들은 그 게임들이 가지는 독특한 성질(특별히 움직임이 많지 않은 오브젝트들 간의 전투)에 의해서 특수하게 사용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때리고 차고 적을 때려눕히는 게임들에 있어서는 그렇게 유연한 방법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래서 <버추어 파이터>의 등장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보면 당연히 그렇게 썩 좋은 그래픽도 아니고, 딱딱하게 각진 모습이 어색하고 우습기까지 하지만 말입니다. 당시라고 해서 이것을 ‘좋다’고 말한 사람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신기하다는 의견은 꽤들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날리시던 박스맨들
이 <버추어 파이터>는 어떻게 보자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CG를 통한 기술들의 시작점이 되는 시도라고 봐도 무관합니다. 물론 그 유명한 <터미네이터 2>가 1991년에 나왔고, <쥬라기 공원>이 <버추어 파이터>와 동시기인 1993년에 나오긴 했습니다. 아마도 영화에서의 CG 사용의 시발점은 이 영화들이라고 봐도 특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터미네이터 2>도 <쥬라기 공원>도 CG를 사용하는 기술 자체를 ‘고급 기술’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이렇게 큰 투자를 받는 영화들이나 어쩌다가 시도하는 대단한 방법이라는 틀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버추어 파이터>는 이 CG 기술을 게임이라는 상대적으로 저변이 넓은 시장으로 끌어내려왔습니다. 물론 아직 기반이 잡히지 않은 기술인 만큼 숙련도가 필요한 일이었긴 하지만, 최대한의 인력을 통해서 최고의 비쥬얼을 뽑아내는 2D 그래픽은 거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여겨지던 시대입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들었음에도 팀의 여유에 따라서 그래픽의 차이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스퀘어에서 발매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라이브 어 라이브>를 비교하면 확연히 비교가 됩니다. 이런 상황이니 작은 회사들은 게임의 가장 중요한 어필점인 그래픽에서 감점을 먹고 들어가는 상황이었고, 이제 막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경쟁력 높은 3D 그래픽에 손을 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니가 당시 차세대 기기인 ‘플레이 스테이션’을 3D 그래픽을 위한 머신으로 디자인하면서 게임회사들로 하여금 3D 게임을 다량 제작할 수 있는 환경까지 만들어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의 저변확대는 기술을 다루는 전문가의 실질적인 숫자와 그들의 노하우, 그리고 그 경험들이 전수되는 토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처럼 우리가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개념을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든 배경이 된 것이겠지요.
당시는 이 아름다움이 거의 한계치였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파이널 판타지 6>
기술적인 확보에 대한 말이 길어졌는데, 사실 이런 상황이 오게 된 데에는 단순히 <버추어 파이터>가 3D 그래픽을 획기적으로 가져왔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버추어 파이터>는 재밌는 게임이고, 완성도도 훌륭한 대전액션 게임이었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3D로 그래픽을 바꾼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오버스러운 대전 액션 게임들의 경향성에서 탈피해서 실존하는 무술에 가까운 동작들로 구성한 점. 또한 그것을 위해 레버의 운동과 버튼의 조합으로 내던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탈피, 단조로운 레버의 동작에 기술을 포함시킨 대신 다양한 형태의 무술동작이 나오게 만든 시스템 구축등은 게임에 또다른 깊이를 부여했습니다. 이런 게임의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캐릭터를 구축한 것 역시 훌륭한 선택이었지요. 물론 지금와서 보면 주인공 아키라와 닌자 카게마루를 제외하면 둘둘씩 짝을 지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게임 자체에 몰입감이 강했으니 새로운 그래픽을 이용했다는 선택이 일시적인 퍼포먼스로 끝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높은 완성도와 재미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 버린것이죠.
어찌되던 이런 과감한 그래픽의 특징과 그에 맞는 시스템 구축으로 인해 <버추어 파이터>는 일종의 스타일이 됩니다. 그리고 <철권>이라는 영원한 라이벌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은 게임의 특징과 비주얼 등 여러면모로 서서히 겨루기 시작하지요. <철권>역시 시작은 <버추어 파이터>의 아류에 가깝게 시작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꽤나 높은 개성을 갖춘채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펀치와 킥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버추어 파이터>와 달리 왼손/오른손/왼발/오른발 이라는 파격적인 조작체계를 구축한 것이나, <버추어 파이터>가 상당히 직관적으로 지향하던 리얼함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던지고 그보다는 절충된 오버스러움을 연출하도록 만들어진 부분 또한 그렇습니다. 이런 변경은 이 두 게임이 라이벌로써 서로를 바라보는 일종의 아이덴티티가 되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서로 발전해나갔습니다. <버추어 파이터>는 진중하고 묵직하며 그만큼 깊이있는 이미지라면, <철권>은 경쾌/호쾌하며 어찌보면 발랄한 이미지를 가진 채로 말이지요. 물론 게임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관점이 꽤나 편중된 의견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만, 일단은 외적인 입장정리, 소위 어필 포인트가 그렇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누워서 술먹는 영감님이 나오는 게임을 진중하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 유명한 <버추어 파이터>와 <철권>의 합동 신문 광고.
제작사들도 인정한 라이벌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그래서 <버추어 파이터 3>까지 도달하려면 <버추어 파이터>가 세상에 어떤 인상을 남기고 싶어 했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죠. <버추어 파이터>는 위에서 말한대로 조금 더 리얼지향, 무겁고 깊이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었지요. 이런 이미지는 단순히 등장하는 캐릭터나 게임의 시스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구성하는 그래픽의 스타일 전반에서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히나 <버추어 파이터 3>에 도달하면 가장 독보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배경입니다.
<버추어 파이터 3>의 배경 중 하나인 만리장성.
계단에 의한 적당한 고저차, 끊어진 성곽에 의해 링아웃이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3D 대전 액션 게임에 있어서 이정도 배경 묘사를 한 게임은 아직도 보기 드물다 여길 정도로 굉장히 디테일하고 아름다운 배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버추어 파이터 3>의 배경은 기존 게임들이 만들고 있던 ‘실제로 있는 곳을 따서 가져온’ 같은 느낌이 아니라 ‘진짜 있는 것 같은’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게임이라는 환경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구축한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실존하는 장소일수도 있다는 느낌이죠. 사실 <버추어 파이터 3>는 이전작과는 다른 어떤 방향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게임을 진행하는 배경이 기존의 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두개의 다른 지붕이 교차해서 다른 고저차를 만드는 지붕 스테이지.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게임의 무대가 대회를 위한 링이며 그렇기 때문에 링밖으로 나갈 경우 장외가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버추어 파이터 3>에서는 과감히 그 특징을 벗어던지고 ‘어딘가 싸울만한 장소’로 방향을 바꿉니다. 물론 기존의 링과 같은 개념의 스모 경기장 같은 스테이지도 있지만, ‘어느 중국 건물의 지붕’이나 ‘바다의 작은 암초 섬’, ‘계단이 있는 고성’, ‘지하철 역’같은 독특한 곳들로 즐비합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새로운 링인 것 뿐만 아니라 그 스테이지의 형태가 그대로 게임에 적용됩니다. 이를테면 고성의 벽은 진짜 벽으로 작용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한다던가, 지붕이나 계단등의 고저차가 존재하는 곳은 그 고저차가 실제 물리력에 영향을 줘서 아래로 내리치는 공격에 더 높은 보너스를 받는다던가, 심지어 지하철역은 지하철이 빠지기 전에 몸이 부딪히면 엄청난 데미지를 받으며(!!) 눕어버린다던가 합니다.
시작시 나오는 지하철에 몸통 박치기 하고 절명하던 추억이 있는 지하철 스테이지.
물론 이제와서는 벽이 당연해진 <철권>시리즈 라던가 맵에 장애요소는 기본이요, 추락등의 요인으로 링이 바뀌어버리기까지 하는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에 비하자면 하찮은 요소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모든 스테이지 기믹이라는 요소는 거의 <버추어 파이터 3>에서 정립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실지로 <버추어 파이터 3>이전의 3D 대전 액션 게임들은 대개 링과 링아웃이 존재하던가, <철권> 시리즈처럼 무한맵이던가 하는 단순한 선택을 했었기 때문이죠. (물론 점프를 해서 오르락 내리락 한다던가 할 수 있었던 <부시도 블레이드>나 <에어 가이츠>같은 게임들도 있지만 이쪽은 지향점이 많이 다르니 논외로 치겠습니다.)
계단과 땅의 굴곡에 의해서 많은 고저차가 발생하는 성곽 스테이지.
그리고 어떤 시스템이 탑재되어있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도, <버추어 파이터 3>의 스테이지 기믹은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예를 들자면 현재 <철권>시리즈의 벽은 소위 ‘벽꽝’을 발생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오브젝트입니다. 하지만 <버추어 파이터 3>에 존재하는 벽은 그 자체가 환경으로써 플레이어에게 변수를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죠. 예시로 들만한 부분이 바로 ‘벽의 높이’라는 부분으로, 상대적으로 벽이 낮은 만리장성 스테이지의 경우 너무 높이 떠서 벽을 넘어가 버릴 경우 링아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단순히 벽에 부딛혀서 공격판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환경에 의거한 디테일한 표현은 필요가 없을테니까요. 물론 초기의 시도이기 때문에 구체화가 덜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애당초부터 이런 환경을 게임 시스템의 응용 요소로 만들기보다는, 플레이어가 직접 겪고 응용할 수 있는 장애의 일종으로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같은 환경을 쥐어주더라도 목적성이 다르면 접근성이 달라지니까요.
<버추어 파이터 3>의 가장 아름다운 스테이지인 설원의 온천.
여튼 <버추어 파이터 3>의 센세이셔널함은 당시 최고급이었으며 지금봐도 그 아름다운 그 그래픽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물들이 진짜로 ‘그 장소’에 있고, 장소가 가진 장애요소를 몸으로 겪으며 싸운다는 현장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역으로 뒤집자면, <버추어 파이터 3>에는 1993년이라는 시간이 가지고 있는 비주얼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현장감이라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내려면 그 장소가 가진 비주얼 역시 리얼리티로 만연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제프리의 스테이지인 암초섬에서 링아웃을 당하면 캐릭터가 바다에 빠지고, 그 안의 작은 산호들과 모래톱, 바다를 거니는 열대어가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실제 게임과 장애라는 환경에는 필요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버추어 파이터 3>는 그 시대의 몇가지 장소를 다양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속을 보여드리지 못해 심히 죄송스럽습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사실 <버추어 파이터 3>가 인류의 역사적인 발명품으로 뽑혀서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래픽적인 발전만을 따지자면 <버추어 파이터 3>는 언젠가 밀려날 퇴물임에도 어째서 박물관에 전시되었을까 생각해본 것이지요. <버추어 파이터 3>가 인류의 기술과 미학적 진보에 영향을 준 의미있는 물건이라면 아무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게임의 오브젝트를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현실의 환경이 게임에 등장하게 만든 의지, 그 의지를 통해 실제로 담겨진 아름다운 조형들. 그리고 그런 의지와 결과물로써 우리가 앞으로 계속 만나게 될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요소를 진보시켰다는 가치를 찾아내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아직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본일이 없기 때문에 실제 어떤 의도로 전시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게이머로써, 그리고 그 게임과 함께 시간을 보내온 사람으로써 그 가치를 되뇌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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