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요일

<일루셔니스트> - 마법사는 있다.



일루셔니스트 (2011)

The Illusionist 
8.7
감독
실뱅 쇼메
출연
장-클로드 돈다, 에일리 란킨, 던칸 맥닐, 질 아이그롯, 디디어 구스틴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 영국, 프랑스 | 80 분 | 2011-06-16
다운로드


때로는 관람한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 힘이 드는 작품들이 있다. 말초적인 자극을 시각적으로 퍼붓는 작품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시각적으로 불편하고 곤란하다면 그것을 감내하고 작품이 원하는 말초적인 쾌감에 동조하면 되는 일이다. 되려 나를 힘들게 하는 작품들은 감정적으로 뒤흔드는 작품들이다. 물론 마치 정해진 대로 스텝을 밟듯이 감정을 만드는 작품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의 우울이 오히려 쾌락으로 작용한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도 때로는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되려 시원한 해소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풀지 못했던 어떤 감정들을 작품을 통해서 쉽사리 토해냈기 때문이다. 이런 작용은 충분히 기계적이다. 그렇기에 이런 것들이 날 힘들게 하지는 못한다.

 

나를 정말 힘들게 만드는 작품들은 되려 덤덤함에서 그 에너지가 나온다. 이 덤덤함이란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 듯한 에너지다. 작중에서의 그들이 겪는 모든 일들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창조해낸 가상의 어려움이 아닌, 그보다 더 작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그리고 그것을 감내하는 그들의 모습은 감정적인 폭발과 그 해소를 보이기 보다는 한발 더 딛는 것 조차 힘들 정도의 먹먹함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세계가 마치 당연한 세계라는 듯한 태도로 그들의 고난을 담을 때야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숨막히도록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일루셔니스트>에 대한 감상도 그렇다. 이 작품은 이 세상의 가장 당연한 법칙을 담고 있다. 바로 클래식의 퇴장이다. 세상은 움직이고 변화한다. 옛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한때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이던 그 마법 같은 것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더는 그 가치를 알아 볼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클래식은 어떤 것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저 편이에 따라서 클래식이라는 단어에 담았을 뿐. 이 작품에서 지나쳐가는 혹은 사라져가는 것이라는 표현 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누군가는 진짜 고전을 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무한할 듯 했지만 끝내는 그 유한함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는 부성애를 꼽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밝혀줬던 그 옛날의 쇼들을 말하기도 하고, 젊은 시절 가지고 있던 꿈이 상기되기도 한다. 이 안에서 이것이 진짜 어떤 것을 지칭했는지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작품을 보는 동안,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한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마법 같았던 어떤 것들을 떠올리며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을 떠났음을 기억해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이 더욱 관객을 힘들게 만드는 지점은, 단순히 그것들이 떠나가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우리들을 지켜줬는지, 그리고 우리의 안에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이것을 지켜보는 과정이 힘든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타티는 우연하게 맡게 된 여자아이 앨리스를 돌보며 그녀가 마법이 진짜라고 계속 믿도록 노력한다. 이것을 그저 딸을 지키려는 양아버지의 분투로 읽어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생기니까. 하지만 앨리스에게서 우리가 가졌던 순수성, 마법이 진실이라고 믿던 그 시절이 투영된다면 이 울림은 한층 더 커지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옛 그림책에서나 봤던 듯한, 오래되어 보이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들. 마치 무대위를 보여주듯이 먼 발치에서 지켜보도록 만든 덤덤한 샷들. 마치 옛 슬랩스틱 영화를 보는 듯한 인물들의 동작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작품 안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만든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의도적으로 쳐진 이 울타리로 인해 그 손을 뻗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한다. 차라리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었으면 그 감정에 동조하고 후련해 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자 속이 탄다. 우리가 우리의 순수성이 어떻게 메말라버렸는지, 또 우리의 클래식들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기억 나는 순간 이 진행을 멈추고 싶지만 객석에 앉은 관객과도 같은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다.

 

단 우리에게 딱 두번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그것은 복화술사의 인형이 전당포에 팔려서 쇼윈도에 전됐을 때, 그리고 타티가 앨리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테이블 위에 놓였을 때다. 그래서 타티의 편지에 남겨진 한마디인 ‘Magicians do not exist’를 보는 순간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것은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박한 현실로 돌아왔기 때문일까? 나는 항상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지만, 그것이 그런 패배감과 현실감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나를 지켜주던 마법사가 모든 마법을 소진했을 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마법이 마법사는 없다는 한마디 아닐까 싶다. 자신을 부정하면서 까지 나 혹은 우리를 지켜주려는 그들 때문에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이 마법사는 없다로 읽히지 않는다. 반대로 이 말이야 말로 마법사는 있었음을, 또는 우리 주변에 수많은 마법들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먼 시절, 동전 한 두개로도 마법을 느끼던 그 시절을 돌이켜주고 그 쓸쓸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들도 우리 시대의 마법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