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화요일

<거리 - 운명의 교차점> - 한계를 부수는 과감성



장르 : 사운드 노벨

발매년 : 1998년

기종 : 세가 새턴, 플레이 스테이션, 플레이 스테이션 포터블

제작사 : 춘 소프트 (현 스파이크 춘소프트)


어드벤쳐라는 장르가 있다. 물론 대다수의 게임은 누군가(주인공)의 모험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 장르는 참 애매할 것이다. 이 어드벤쳐라는 장르의 특징이라면 이것은 정말 주인공의 모험의 시작과 끝, 그 과정 자체를 그린다는 점이다. 조금 더 편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게임들이 추구하는 활극적이고 전투적 요소가 가미된 그런 모험과는 궤가 다른, 진짜 주인공이 상황에 대면하고 재기 넘치게 그것을 빠져나가는 그런 뉘앙스의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어드벤쳐 게임의 시초 <Colossal Cave Adventure>


사실 이 장르의 원전은 실질적인 텍스트로 이루어진 매체, 즉 소설이 있었다. 초기의 어드벤쳐는 텍스트로 상황을 알려주고 주인공인 내가 무엇을 할지 직접 타이핑해서 해결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갇힌 방에 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고 북쪽 벽에 수도꼭지가 있다고 알려주면 직접 수도꼭지를 잠근다.(Turn off Tap)라고 쳐서 물을 막는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장르는 기본적으로 퍼즐적인 개념의 장르였기도 하다. 텍스트와 퍼즐, 이 두가지 요소가 본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컴퓨터의 성능이 상승하고 시각적인 개념이 확정되면서 어드벤쳐도 그래픽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과거에는 텍스트로만 알려주던 상황을 그래픽으로 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명령어 또한 타이핑에서 버튼을 클릭하는 형식으로 변해갔다. 그 과도기에 그림과 텍스트로 상황을 알려주고 지정되어 있는 명령어를 찾아서 선택하는 형태의 어드벤쳐 게임들이 등장했다. 이 개념은 일본으로 흘러가 <포토피아 연속 살인사건>이라는 게임으로 알려졌으며 그 뒤로 꾸준히 일본 게임계에서 그 족적을 넓혀나갔다.


일본 텍스트 어드벤쳐의 시초 <포토피아 연속 살인사건>


서구식 어드벤쳐가 점점 더 직접적인 행동(마우스에 의한 이동지 설정과 명령어 아이콘 클릭 등)으로 변모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림과 텍스트, 명령지의 선택을 기준으로 하는 어드벤쳐를 꾸준히 생산해나갔다. 되려 일본의 이런 스타일은 더욱 고착화되어 그림과 소설, 주인공의 선택이라는 단순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기존에는 주인공에게 상황을 던지고 행동을 요했다면, 이제는 주인공은 알아서 행동하다가 가장 중요한 선택지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을 요하게 된 것이다. 추리소설이 쭉 이어지다가 범인을 밝히는 상황에서 범인의 이름이 여러 개 뜨고 한 명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개념의 게임을 노벨이라는 장르로 따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시초는 춘 소프트에서 만든 <제철초>였으며, 이때 구분한 장르명은 사운드 노벨이었다. 소설에 그림과 소리를 넣었다는 의미로 주인공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여러 개의 선택지가 떠오르고 플레이어가 결정한 것에 따라서 이야기가 바뀐다는 개념이었다. 이후 리프라는 작은 회사에서 <시즈쿠>라는 게임을 비쥬얼 노벨이라고 칭하면서 일본의 어드벤쳐 게임계는 비쥬얼 노벨의 천국이 되었다. 비쥬얼 노벨은 아니메 풍미의 미소녀 캐릭터와 적당히 이어질 수 있는 스토리, 그리고 성인 게이머들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성행위 장면을 넣음으로써 독자적인 시장 구축을 완성해냈다. 이제와서 일본의 텍스트 어드벤쳐 라고 하면 대개 이것을 떠올리게 되었을 정도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GUI를 기반으로 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사진은 <원숭이 섬의 비밀>

 

다만 이제와서는 이러한 노벨이라는 장르가 과연 게임의 가치로써 존립이 가능한가에 대해 논하는 경우가 생겼다. 현 세대의 뛰어난 성능을 베이스로 직접적인 일체감을 보이는 게임들에 비해서 이 장르는 지독하게도 접촉요소가 부재한 탓이다. 플레이어는 그저 소설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에 자신의 선택을 툭 하고 던질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게임이 주는 게임만의 테이스트인 체험이라는 요소에 있어서도 많이 거리감이 존재한다. 이 장르에서의 체험은 소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임만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그냥 눈과 귀를 충족하는 소설을 보다가 결정만을 내리게 만드니까 말이다.

 

다시 춘 소프트의 <제철초>로 돌아가면, 춘 소프트는 그러한 게임적 요소의 부재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했다. 주인공의 선택으로 인해 변화하는 내용의 진폭을 최대급으로 늘려놓아서 그러한 변화폭을 즐기는게임 플레이를 구축하려 한 것이다. 물론 후속을 따르는 비쥬얼 노벨들 역시 선택지에 따라서 게임의 내역이 변화하지만 <제철초>에서 목표하는 그것은 훨씬 더 큰 변화폭을 보여줬었다. 이를테면 <제철초>의 여주인공은 어떠한 비밀을 갖춘 여성인데 이 비밀이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서 심각하게 변화한다. 그들이 갖힌 저택의 딸이며 어머니의 정신이상에 의해 입양된 여성이다 라는 흔한 설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남자다, 외계인이다, 유전자 개조를 받은 인간이다, 괴물과 혼혈로 사실 물고기 인간이다 등등 수많은 전개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흐름 자체가 크게 변화하진 않지만 여주인공의 정체와 저택과의 연계성이 심각할 정도로 요동치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재미를 부여하려 한 것이다. 또한 이것들에 있어서 승리패배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으니 과정을 즐기는 과정으로써의 게임에도 부합시키려 했다.

 

미국과 반대로 텍스트 위주로 발전한 일본의 '사운드/비쥬얼 노벨'. 사진은 <제철초>


덕분에 지금도 컬트적인 가치로 꼽히는 <제철초>지만 이것은 정말 무모하고 과감한 시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야 명확한데, <제철초>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야기의 가지들은 주인공(플레이어)의 선택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움직이는 갑옷에 공격받는 여주인공을 도와주느냐 도망가느냐라는 선택과 여주인공의 정체가 남자냐 외계인이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이것은 <제철초>라는 게임 플레이가 일종의 재미있는 체험이긴 하지만, 그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게임 플레이로써 작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후 춘 소프트는 <카마이타치의 밤>이라는 미스터리/추리극을 기반으로 한 사운드 노벨을 만듦으로써 사운드 노벨 붐을 일으킨다. <카마이타치의 밤>은 전작 <제철초>에서 가지고 있던 인과의 부정합을 철저히 수정하고 주인공의 선택이 이야기의 성패를 가르도록 유도하였다. 이로 인해서 본 게임은 <제철초>와는 다르게 플레이어의 선택 하나하나가 소중해지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체험으로 만드는데 그쳐버렸다. 물론 <제철초>처럼 전개를 뒤엎어버리는 분기들을 보너스 요소로써 제공했지만 이것은 핵심이 되는 게임 플레이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어디까지나 추가적인 가치로써의 요소였다.

 

이 방식의 폐해는 게임의 완성도가 소설의 완성도와 밀접해진다는 점에 있었다. 가장 올바른 선택지를 선택해서 나가는 게임 플레이의 큰 줄기의 이야기가 완성도가 높으면 게임의 몰입도와 재미가 상승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게임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기타 게임적인 요소들인 그래픽, 사운드, 게임 시스템, UI 등등은 소설을 읽는데 보조적인 역할이 되어버리는 결과도 얻게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사운드 노벨비쥬얼 노벨이라는 장르명을 가진 모든 게임들에게 적용되어 버렸으며, 이 부분이 이 장르가 게임으로써의 가치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후 <카마이타치의 밤> 3편까지 진행되고, <진 카마이타치의 밤>이라는 새 시리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운드 노벨은 <카마이타치의 밤>에서 끝났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미 게임의 시스템을 더 확장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베이스가 되는 소설의 재미에 모든 성패를 걸어야 하는 그 구조자체가 타파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제작사들(주로 비쥬얼 노벨을 만드는 제작사들)은 이 구조를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게임을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노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단 일본식 텍스트 어드벤쳐는 고착화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춘 소프트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장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이었는지, 아니면 한계를 인정하기 싫은 고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그들은 장르의 벽을 깨어냈다는 점이다.



<거리 - 운명의 교차점>의 게임화면. 기존과 다르게 실사 배우의 이미지를 쓰고 있다. 


춘 소프트의 사운드 노벨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으로 나온 <거리 운명의 교차점>의 외관은 기존의 사운드 노벨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배경엔 그림(배우에게 연기를 시켜서 찍은 사진)이 나오고 그 위로 텍스트들이 나오며 게임을 진행한다. 플레이어는 여전히 주인공들에게 중요한 순간에 나오는 선택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맞춰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끝? 아니다. <거리 운명의 교차점>에는 굉장한 변화가 있었다.

 

<거리 운명의 교차점>에는 무려 8명의 주인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바톤 터치를 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다. 8명의 주인공은 같은 시간과 (크게 봤을 때)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며 플레이어는 언제라도 시점을 뛰어넘어서 인물들을 교체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이 다르냐고? 8명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있다.

 

잠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때마침 버스가 딱 도착하게 되어서 유유히 버스를 타고 정시에 정확히 출근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런 역사의 뒤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사실은 버스가 내 앞에 도착하기 10분전에 한 여성이 무리하게 도로를 건너려다가 버스가 멈춰서게 되었다. 버스기사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결국 그로 인해서 버스가 다음 신호에 걸리게 되었고 예상보다 5분이나 늦게 도착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버스에 탑승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앞서서, 한 남자가 걸어가면서 먹던 핫도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여자가 끌고가던 강아지가 도로를 가로질러서 핫도그를 향해 뛰어갔고, 여자는 급하게 강아지를 잡기 위해서 뛰어가다가 버스에 치일뻔한다. 이로써 나, 남자, 여자간에 사건의 링크가 생기지만 서로는 그 사실을 크게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어찌되던 이 세사람의 역사는 각각의 인물이 생각보다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게임은 바로 이 부분을 극대화 하여서 제작되었다. 8명의 인물은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생기는 몇가지 선택점들은 나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7명의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거리 - 운명의 교차점>은 각각의 주인공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도록 되어있다.

때로는 자동으로 시점이 옮겨가기도 한다.


이 개념이 중요한 부분이 있다. 첫째, 기존의 사운드/비쥬얼 노벨들은 주인공이 자신을 위한선택을 위해서 선택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거리 운명의 교차점>은 그와 반대다. 주인공들이 발생하는 선택지는 실제로 주인공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들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선택들로 인해서 다른 인물들의 역사가 크게 변화하는 것이다. 그저 생각없이 다리 아래로 돌을 던졌을 뿐인데 다른 주인공이 이 돌에 맞아서 사망 할 수도 있다. 이때 돌을 던진 주인공의 역사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돌에 맞아 죽은 주인공은 큰 변화를 겪는 것이다. 물론 이때 죽은 주인공에 의해서 뒤의 역사가 변화하므로 결국 자신에게도 불행한 결과가 오게 되기도 한다.

 

둘째, 기존의 노벨들은 이야기를 만드는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사운드 노벨인 <제철초>는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형태 였던 것을 기억해보자. 그리고 그 뒤의 후발주자들 역시 주인공의 행동을 선택해서 이야기의 방향이 선정되고 생성되는 형태를 고수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 반대의 개념, 즉 이야기를 수복하는 개념인 것이다. 즉 이 게임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절대로 8명의 인물이 모두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을 때 모두 이어지도록 유도되고 있다. 한명의 주인공이 실수로 한 선택에 의해 다른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결국 남은 6명도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결국 모든 주인공들이 최선의 선택을 한 모두 결과를 보는 역사를 각자의 선택을 조율하여 다시 복구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셋째, <제철초>는 주인공의 선택에 의해서 후반의 전개가 변화하며 그로 인해 다양한 장르로 파생되는 것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행위와 결과에 인과가 없기 때문에 탈락되었다. 이후에는 다른 장르로의 파생을 보너스 요소로 제공하였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게임 내에서 여러 장르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포기되어있었다. 하지만 <거리 운명의 교차점> 8명의 주인공을 제공 하는 것만으로도 이 한계를 쉽게 클리어 해냈다. 8명의 주인공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에 다른 장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럼에도 서로에게 영향을 줘서 여러 장르의 이야기가 공존하는 게임이라는 개념을 달성해냈다.

 

춘 소프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운드 노벨에는 한계가 찾아왔다.’는 이야기 자체에 완전히 반론을 던졌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방식을 통해서 결국 사운드 노벨은 게임 플레이라는 개념을 되찾았고, 단순히 소설의 완성도가 아닌 게임 시스템(인물 간의 연계성)을 통한 완성도 유지라는 기본적인 요소를 완성해냈다. 이때 알려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춘 소프트가 이렇게 장르의 한계를 부수고 그 생명력을 연장한 데에는 장르의 특징을 역으로 사고해낸 그 과감성이 있었다. 이것은 자신들이 장르를 창조해냈다는 자신감과 게임을 단순히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써 바라보는 진지함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후속작 격인 <428 - 봉쇄된 시부야에서>

다수의 주인공, 실사 인물을 캐스팅한 그래픽, 상호간섭 등의 모든 것을 계승하고 있다.


<거리 운명의 교차점>은 이후 <428 – 봉쇄된 시부야에서>라는 후속작을 얻는다. 하지만 이 게임들의 특징은 더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사운드 노벨이라는 장르가 가진 한계에 다시 막힌 탓이다. 다수의 인물들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상상이상으로 컸던 것이다. 춘 소프트는 이후 <카마이타치의 밤> 시리즈, <기화기초>, <극한탈출> 시리즈로 계속 노벨 게임을 만들어 내지만 이 정도로 과감한 시도는 해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춘 소프트의 이 게임들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은 <거리 운명의 교차점>에서 보여줬던 자신감과 진지함, 그리고 과감성이 아직도 게임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제는 그런 굉장한 체험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게임은 여전히 제 1로 선택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