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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가면 라이더 류우키> - 선의 찬가



가면라이더 드래건

정보
챔프 | 시 분 | 0000-00-00 ~ 0000-00-00
출연
스가 타카마사, 마츠다 사토시, 스기야마 아야노, 키쿠치 켄자부로, 츠노가에 카즈에
소개
원인불명의 실종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나던 어느 날 한명의 여성이 집 안에서 사라진다. 거울에서 나타난 몬스터에게 납치된 것이다....

*국내 방영제는 <가면라이더 드래건>입니다.


인간의 선의를 조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주 반복되는 테마이다. 그러한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선의를 더 고결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인간의 삶이 더 복잡해지고 생각의 범주가 넓어질수록 이것을 표현하는 일에는 한계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도덕적인 주인공이 자신의 선함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현대에는 통용되지 않는다. ‘흥부와 놀부혹부리 영감같은 이야기가 현대와는 먼 이야기로 인지하게 되는 이유이다. 게다가, 이러한 권선징악의 전래동화는 선함의 가치를 어필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여건들을 만들어둔다. 현대의 우리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단순한 구도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는 현대로 올수록 사회의 형태, 즉 다양한 정보에 노출된 현 사회의 구조를 의식해야 한다. 그렇기에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에는 왜 선함이라는 가치를 직접적으로 권할 수 없을까?

 

현대에서 선의의 반대어는 욕망이라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선의를 행하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알면서도 특별히 따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손해를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이익과 손해라는 개념은 애당초부터 각자가 가진 욕망에서 기인한다. 즉 선의는 개인이 가지는 욕망과 반대로 움직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암묵적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룰이다. 시간마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서 선의를 위한 약간의 시간마저도 욕망에 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에서 권선징악을 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함께 논해야 한다. 욕망으로 가득한 세계에 선의를 가진 인물을 던지고, 그들이 선의라는 에너지로 얼마나 행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선의가 승리하는 복잡한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 그저 인간이 선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승리를 거머쥐어서는 안 된다. 그런 과정은 흥부가 제비에게 박씨를 받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반하면서 까지 추구하는 선의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의미있는 가치인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이 실패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관람자에게 그 가치를 인식시킨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가면 라이더 류우키>(이하 류우키)는 일본의 대표 히어로 시리즈 가면 라이더시리즈 중 하나다. 그리고 시리즈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특징들, 주인공이 가면 라이더로 변신하여 인간 사이즈의 괴생명체인 괴인과 싸운다는 개념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기존 시리즈와 명확한 차이를 두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면 라이더가 히어로의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 작품에서 말하는 가면 라이더는 일종의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를 말한다. 의문의 사나이 칸자키 시로가 뽑은 13(물론 TV 시리즈에 등장하는건 10)의 인물들은 각자 가면 라이더로 변신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변신하지 않는다. 13명의 가면 라이더는 서로 싸우게끔 만들어져 있으며 최후에 남는 1인은 새로운 생명이라는 힘을 얻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가지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괴인 미러 몬스터와 싸우는 이유는 미러 몬스터와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의 힘이 강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초 설정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가면 라이더로 변신하는 개개인의 욕망에 집중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열망이 존재하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 게다가 게임의 주최자인 칸자키 시로는 게임을 더 격화 시키기 위해 강력한 욕망을 가진 자들을 선수로 선발한다. 그로 인해 이전까지 슈퍼 히어로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던 가면 라이더는 순식간에 속물로 타락해버린다.


 

하지만 단 한명, 우연하게 이 게임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인 키도 신지만은 그 욕망에 참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행위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러 몬스터에게서 지키기 위해, 그리고 가면 라이더 끼리의 싸움 자체를 막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키도 신지와 이외의 다른 라이더간의 목적의 차이를 기준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선의를 가진 주인공 키도 신지를 기준으로 흐른다. 하지만 신지와 사사건건 반목하면서도 파트너처럼 활동하는 아키야마 렌을 시작으로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라이더들의 사연도 함께 보여준다. 불치병에 의해 의식조차 찾지 못하는 연인을 되살리기 위해 싸움을 유지하는 렌의 입장 역시 그가 살인 게임에 동조하는 충분한 변명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영웅이 되기 위해 등 등장하는 수많은 동조할 수 있는이유들과 게임을 즐기기 위해, 살인을 즐기기 위해 등 동조할 수 없는이유들을 함께 보여준다. 관객이 이 이유들에 동조를 하던 하지 못하던 작품은 이 모든 이유들을 욕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어버린다. 대답이야 어찌되던 개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행위 그 자체는 욕망의 연장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 안에서 그 욕망들은 동등한 무게를 지니며, 군상극에 가까운 독특한 극 구조로 인해 관객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오직 그 판가름은 각각의 관객들이 자신의 도덕적인 잣대로 해석해야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라이더들의 생각을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에 갖는 것이 아님도 함께 밝힌다. 그들이 특별히 남들보다 더 악독하거나 욕심이 많아서 이렇게 활동하는 것인가? 이 작품의 오프닝 영상에서 얼굴을 가린 인물들이 가면 라이더로 변신하는 카드를 들고 화면을 보고 밝게 웃고 있다. 결국 이 욕망의 작용은 그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이며, 그 작품을 보고 있는 관객들조차 그 선택에서 빗겨나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편의 추가 에피소드인 TV 스페셜편에서 '가면라이더 베르데'로 변신하는 타카미자와 이츠로는 주인공 신지를 향해 "모든 인간은 라이더다!"라고 일갈한다. 모든 인간이 가면 라이더로 변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모든 인간이 가면 라이더와 같은 입장에 놓이면 모두 싸워서 쟁취하게 될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는 인물은 주인공인 신지다. 신지가 갖는 선의는 이러한 구조를 넘어서 극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다는 사상은 개인의 욕망이 아닌 어떠한 도덕적인 가치로 비춰진다. 그래서 이 구조로 이 것이 무조건적으로 옳다고 말하는가? 아니, 되려 반대다. 이런 이상적인 가치를 쫓는 신지는 극중에서 모두에게 바보라고 불리울 정도로 한심하게 비춰진다. 때로는 이런 관점에 의해 애처로울 정도가 된다. 처음 운을 떼었듯이 욕망속에서 존재하는 선의는 다른 욕망들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되려 곧바르고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욕망들에 비해서 대의에 가까운 선함은 황망한 이상이 되어버린다. 때로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각자가 갖는 욕망보다도 현실성이 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될 때 조차 있다. 덕분에 신지는 그 선함으로 인해 무시당하고 거절받고 심지어는 이용당하기 까지 한다. 욕망이 살아 숨쉬는 세상에서 도덕적인 선함이 갖는 위치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극은 신지에게 선함을 포기시키지 않는다. 이 작품이 지독한 이유는 이런 구성임에도 누구 하나 신지에 의해 감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런 뚝심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이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각자에게도 자신에게 필요한 그만큼의 무게들이 존재하기에 선뜻 같은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게다가 관객들도 그런 무게들을 다 통감하고 있으니 그들이 야속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도 없다. 아니 되려 스스로가 가면 라이더가 된다면 그들과 똑같이 될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에서의 가치의 충돌은 신지가 가진 도덕적인 이상과 각자가 가진 개인적인 욕망이다. 관객 각자에게 판단이 부여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관객은 각자의 관점으로 선함이 어디까지 나아가나를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신지의 대의가 다른 라이더들과 충돌하는 만큼 관객 자신들이 가진 욕망과도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극중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신지가 바보 같다고 비하할 수는 있겠으나, 그가 틀렸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어찌되던 인간이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지향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가 자신의 이익이라는 개념에 얽혀있기 때문에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니까. 그러므로 관객들은 신지의 전진을 응원하게 된다.

 

그래서 신지의 이런 도덕적 진격은 성공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의 말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로 흐른다. 신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려 하지만 결국에는 승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신지의 이 기나긴 여로는 극중에서 단 한사람을 감화시키게 된다. 어딘가에 등장한 강력한 카리스마의 인물처럼 수십 수백명을 동조시키진 못했다. 하지만 관객조차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잡하게 일그러진 세계에서 살아가던 착한 바보하나가 누군가 한명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한다.

 

혹자들은 이런 <류우키>의 구조를 보고 이 것은 히어로물이 아니라고도 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이 극은 한 영웅의 고고한 일대기를 보여주는 형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어로-영웅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 보자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결국 욕망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까지 세상에 선함을 가져오려는 자들이 영웅이라 한다면, <류우키>라는 극 내부에서 신지가 보이는 저돌적인 선함은 영웅의 본질에 대한 대답이지 않을까. 정의라는 대의를 등에 업고 항상 승리하는 자들만을 영웅이라 부를 수 있는 시대는 지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박 타는 흥부가 과거의 유산으로 묻어져 버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작품의 주인공 키도 신지는 가면 라이더 이기 때문에 영웅이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선함을 믿고 도덕적인 대의를 끝까지 믿으며 나갔기 때문에 영웅인 것이다. 이것을 영웅담이라 하지 않으면 얼마나 야속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