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시 신은 <최종병기 그녀>의 연재가 끝난 후, 단행본에 '이 작품은 전적으로 슈지와 치세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밝혔다. 극중에 묘사되는 전쟁의 디테일을 극단적으로 줄인 이유도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최종병기 그녀>는 그의 바램대로 '전쟁이라는 시국에서 벌어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 로써 잘 알려졌다.
최근에서야 제대로 보게 된 <최종병기 그녀>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딱히 발랄한 이미지는 갖고있지 않다. 전쟁과 세계멸망 따위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다가, 두사랑의 사랑이라는 것도 꽤 척박한 느낌이다. 이러다 보니 읽는 동안 전란속에서 꽃피는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같은 이미지는 그다지 그려지지 않는다. 허나 그럼에도 이 작품이 두사람의 절절한 감정을 표현하는데에는 일정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작용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읽어보면 어떨까? <최종병기 그녀>는 오직 사랑만을 테마로 삼고 있는 만화는 사실 아니었다- 라는 식으로. 사랑이 전면으로 대두되고, 전쟁이라는 기막힌 배경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사랑이야기로만 읽는건 아쉽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의 내부에 흐르는 어떤 음울한 에너지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찾아보자는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최종병기 그녀>는 그 제목에서부터 이미 '죽음'을 테마화 시키고 있다. '병기'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써 '죽음'이라는 개념과 필수 불가결한 관계이다. 하물며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전쟁이라는 비극은 또 어떠한가. 그보다 훨씬 더 적나라한 힌트 - 슈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고 구토 한 후에 치세가 병기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미 이 만화는 발단부터 두사람의 사이에 죽음이라는 에너지를 배치시키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죽음이라는 테마는 삶이라는 테마와 함께 움직인다. <최종병기 그녀>의 본 내용중에서도 '살아라'라는 대사가 꽤 많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이 작품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건 좀 안타까우니 이렇게 설정한다. '진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물론 타카하시 신이 직접 밝힌대로, 진짜 살아간다는건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다.
슈지와 치세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동일하지 않다. 슈지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죽음을 적용할 수 있지만, 치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업무인데다가 스스로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불사신에 가까운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세에게는 자주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 그림자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은 개념적인 죽음, 즉 자신을 잃어버림의 죽음이다. 군에서의 치세의 성격이 냉랭하게 변하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죽어간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그런 그녀를 위해 슈지는 몇번이고 치세라는 인물을 정립해주지 않던가?
그리고 어찌보면 치세가 가지고 있는 죽음의 정의가 진짜 죽음의 정의 일 수 있다. 요컨데 우리가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더 본질적인 죽음은 나 자신이 없어져 버린다는 존재론적인 죽음이라는 것이다. 작품의 초기, 표면적인 생사만을 눈에 담던 슈지 역시 치세가 가지고 있는 이런 존재론적인 소멸을 차츰 이해해 간다. 작품을 보면서 슈지가 성장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슈지가 그런 깨달음을 얻어간다는 것으로도 알아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치세의 죽음'을 막아가는 것은 무엇이었나? 즉, 그녀가 '슈지가 정의하는 치세'로써 존재할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나? 치세는 슈지를 지키기 위해, 즉 슈지와 사랑하기 위할때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혹은 그런 슈지가 부재중일 때에 그녀의 자아를 유지시켜 준 것은 자위대의 테츠였다. 그는 치세에게 마치 슈지의 대리적 존재인 것 처럼 여겨지며 그녀를 보호한다. 테츠가 죽었을때의 치세의 절규는 그런 의식의 반영인 것이다.
그 외에, 작중에서 묘사되는 많은 죽음이 그렇다. 아케미는 죽음의 직전 슈지에게 고백하려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안위를 준 것은 상처입은 자신의 알몸을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슈지의 말이었다. 결국 사랑으로 존재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과 함께 알 수 있는 것. <최종병기 그녀>에서 말하는 사랑은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니다. 상대를 안고 싶어하는 순수한 에로스적인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듯 오직 플라토닉만이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에로스적 사랑도 상대를 소유하고 싶다는 정신에 기인한 내적인 사랑이며, 그것이 바로 살아있음을 증명시켜주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존재'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확인할만한 물질화된 요소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멸망하고, 마치 방주같은 몸이 된 치세와 단 둘이 남은 슈지는 그 상황에도 굶어죽을 걱정을 한다. <최종병기 그녀>는 앞과 뒤가 같다. 그들은 죽을 걱정이다. 이들의 죽음은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 이기 때문이다. 생이 끊어지는 것이 먼저인지, 사랑이 다 하는 것이 먼저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랑한다는 것, 혹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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