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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기동전사 건담 0083 : 스타더스트 메모리> - 생각이 없어서 나쁘다.



기동전사 건담 0083 : 스타더스트 메모리

정보
- | 시 분 | ~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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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1979년 기동전사 건담이후로 많은 건담 시리즈가 발표되었다.


<기동전사 건담 0083>(이하 건담 0083)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지구 연방군의 관함식을 습격하는 아나벨 가토의 습격씬을 꼽는다. 과거 솔로몬이라는 구역에서 공훈을 세웠다 하여 '솔로몬의 악몽'이라는 이명을 부여받은 아나벨 가토는 스스로 '솔로몬이여. 내가 돌아왔다.'라고 외치며 적에게서 탈취한 핵 무기로 적의 관함식을 통째로 분쇄한다.


운부터 떼고 들어가자면 이 작품에서, 특히 이 장면은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불공정하다. 이 장면은 조약을 깨고 뒤에서 몰래 금지된 핵 병기를 만드는 쪼잔하고 간악한 연방사관들을 지온공국의 우국충절이 심판을 내리는 장면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에서 아나벨 가토는 심판자이며 영웅이다. 또한 전 대전에서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복수자이기도 하다.  최소한 이 씬 내에서로 한정 짓는다면 이 작품의 스탭들은 명백하게 아나벨 가토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 연방이라고 해서 진짜로 내편인 것도 아니고, 지온 공국이라고 해봐야 작중 설정은 지구인이니 지구 연방과 특별히 다른건 아니다. 1970년대 로봇 애니메이션들 처럼 외계인이 지구를 습격한 것도 아니니, 내가 굳이 '지구'연방에 감정이입 해야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이 안에서 정치적 불공정성을 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야기를 더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자들이 수천장의 셀화와 공들인 연출, 그리고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폼이 바짝 들어간) 대사를 부여해서 미화시킨 이 아나벨 가토라는 캐릭터가 작품 전체에 어떤 역할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말이다.


설정을 나열하는 것은 가치가 없을테니 간단히 늘어놓자면 이렇다. 지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서 우주공간에 스페이스 콜로니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겼고, 이들이 지구에서 차별을 받자 콜로니들은 지온 공국이라는 연합국을 만들어 지구 정부와 전쟁을 벌인다. 이 와중에서 지온 공국은 정치적 황폐화를 걸어 독재자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 암투의 장으로 변해버리고 여차저차 해서 지구 연방에게 패배한다. 지온 공국의 패잔병들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우주로 밀려났다. 여기까지가 전작이라 할수 있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기동전사 건담>의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에 토미노 감독이 지온 공국을 위해 깔아놓은 태도다. 2차 세계대전에서 베이스의 영감을 얻은 토미노 감독은 지온 공국에 2차 세계대전시의 독일과 일본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지온 공국의 군인들은 서로 만났을때 당당하게 '지크 지온'이라는 자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인사를 건내고, '공국의 부흥을 위해' 따위의 대사를 읊으며 특공한다. 물론 그 저변에는 핍박당하는 사회계층의 응어리라는 개념을 깔아두긴 했으나 결국 그들이 하는 행위는 전쟁에서의 명예에 대한 과한 집착과 미화, 그리고 독재자에 대한 긴밀한 충성심으로 정리된다. 토미노 감독은 이 지온이라는 국가가 명백하게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지구 연방의 편을 들어주지도 않았지만. 애당초 지구연방이 차별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나?)


그리하여 본 작품인 <건담 0083>에 도달한다. 지온 공국의 패배를 뒤집은 재부흥을 목표로 하는 데라즈 플리트라는 신흥 세력이 생겨나고 그 대표자 중 하나로써 아나벨 가토라는 캐릭터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만화에서 그의 입장은 주인공인 코우 우라키에 대적하는 안타고니스트이지만 그 심성은 대쪽같고, 충성심이 깊으며, 조약을 깬 지구연방의 태도에 진심으로 순수하게 분노하는 패잔국의 아름다운 우국충절이다. 본 작품이 진행되는 도중에 나오는 가토의 행동은 모두 순수하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그의 목적은 오직 자국의 부흥과 더러운 연방에 대한 반격뿐이다. 그는 등장할때마다 딱 부러지는 말투로 관객에게 인상을 찍어주고, 성장도 제대로 하지 못해 방황하는 주인공에게 일갈의 말을 내뱉으며 연륜을 과시한다. 이러한 대비로 인해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캐릭터에게 애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풋내기인 주인공과 확실히 대비되는, 연륜이 느껴지면서도 과시하지 않고 항상 정론(처럼 들리는)을 외치는 멋진 애국자니까.


이 작품이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애석하게도 <건담 0083>에서 그리는 지온공국의 모습은 <기동전사 건담>에서 그렸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미 죽어서 사라진 공국의 독재자를 그리워하며 그와 그의 국가를 위해 전쟁의 결과를 뒤엎으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의 큰 전쟁을 일으키려 하며 그것에 대의와 명예가 걸려있음을 어필한다. 까놓고 말해서 이들은 전작보다 더 심각한 군국주의자들이다. 하지만 핵무기 금지라는 조약을 맺어놓고, 뻔뻔하게 핵무기나 만드는 지구 연방이 묘사되면서 이들과 대비되기 시작한다. 게다가 지구 연방 내부의 정치적 알력싸움도 함께 노출한다. 이로 인해서 데라즈 플리트가 가지는 군국주의적 냄새는 패잔국의 순수한 부국열망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최소한 이들은 표면적으로 지저분한 행위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 이 작품에서 데라즈 플리트의 일원들과 아나벨 가토는 순수하고 청렴한 애국자들로 묘사된다. 그들은 자국의 부흥을 위해, 그리고 더러운 행위를 반복하는 적국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국가는 전범국이며 군국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고 독재자를 찬양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이럴때 생기는 아이러니는 표현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이 상대하는 적국이야 말로 음흉하며 관료주의에 찌들은 답답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 정리를 기반으로 처음에 제시한 장면을 다시 돌아보자. 이 장면에서 아나벨 가토를 미화하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정하지 않은가?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자. 그렇다면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자들인가? 이 만화를 통해서 국가의 애국심을 함양하고 또다시 강력한 군세를 만들고 싶어하는가? 우습게도 그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무도 이 <건담 0083>을 지독한 극우 만화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도 여기에 있다. 물론 작중에서 표현하는 극단적인 대비와 정치적 입지에 대한 모순은 정말 보기 흉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돌리지는 않는다. 단 한번이라도 관객을 향해 국가를 위해 귀속하며 충의를 갖고 싸우라고 부르짖지 않는다. 특정한 인물들에 대한 애정은 존재할 지언정 관점 자체는 덤덤한 것이다. 하물며 극중에서 전작인 <기동전사 건담>과 그 관계를 묘사하지도 않으니.(물론 이 작품을 찾아보는 사람들은 거의 알고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런 애먼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가?


이 작품을 평할때, 이 작품을 '사무라이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몇번이고 극화된 <주신구라>를 기억할 것이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대체로 뉘앙스가 매칭된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솔직히 나의 결론은 그렇다. 이 작품은 멋있는 남자들을 그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일본식 '멋있는 남자'의 기준인 사무라이 영화에서 그 근간을 찾은 것 뿐이다. 자신들이 처단될 줄 알면서도 충심을 위해 화려하게 마무리를 장식하는 많은 남자들의 역사 말이다. 결국 <기동전사 건담>에서 셋팅을 빌어와서 사무라이들의 최후를 화려하게 그린것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 정치적 불공정성은 몇 마초이스트들이 벌인 촌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패배한 주군을 위해 이 한목숨 바치는 남자들이 필요했던것 뿐이니까. 그게 하필이면 독재자의 수하가 되었을 뿐이다. 물론 완전히 모르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프로들이 하는 일인 이상 전작에 대한 점검은 충실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이 '몰라서' 그랬다기 보다는 '알았는데 신경쓰지 않았다'라고 보는게 더 적당하다고 보인다. 허나 그렇다고 혐의를 벗겨줘야 할까? 결국 그들이 만든 결과물은 사람들을 썩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지해서 잘못한것보다 생각이 없어서 잘못한게 더 나쁘지 않을까?



간간히 본 작품에 등장하는 중립적인 세력, 시마 가라하우가 존재함으로써 정치적 편중성을 중화시키고 있다는 평도 있다. 양쪽 모두에게 더럽게 배반당해 충의도 무엇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동의한다. 단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서 지온 공국을 대변하는 이들은 데라즈 플리트와 그 중심인물 들이기 때문이다. 시마가 과거 지온에 의해 배반당한 사건을 지금에와서 아무리 들먹인다고 해봐야 지금의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뭐 최소한 아규 데라즈가 굳게 충심을 보이고 있는 지온공국이 나쁘다는 전제는 만들수 있겠지만. 기왕 하려면 시마의 과거를 더 가혹하고 직접적으로 묘사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중요한건 작중의 사무라이들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없는 짓거리를 하려는지 더 묘사했었어야 한다. 그랬었어야 최소한 이런 글은 안나왔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