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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서울 성곽길 산책


 (출처 : 종로구청)


  작년부터 준비해 왔다. 아, 꾸준히 걸으면서 다리를 단련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마음의 준비를 해 왔다는 뜻이다. 소심한 탓에 실패하는 것을 두려웠다. 한 번에 걸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예상 거리는 20km 이쪽 저쪽...... 할 수 있을까 만약에 시작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중간에 그만 둔다면 자신감에 타격이 될까봐 걱정스러웠다. 원래 체력이 약한 만큼 도전이라는 글자가 계속 부담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내가 살면서 이런 용감한(?) 도전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지난 해에 홍보물로 처음 접한 성곽길 브로셔를 보자마자 이거다라는 생각이 절로 튀어나왔을 만큼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성곽길 완주 미션 목표 달성일을 올해 봄으로 잡았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달성하는 동안 가슴은 열정으로 가득차고 하루하루를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거 말이다. 겨울에는 추워서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하여 답답했는데 3월이 되어서야 서서히 산책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3일은 하루에 6km 이상 걷기, 이것을 꾸준히 실행하려고 했으나 2주 정도 실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내 인생에서 항상 그랬다. 계획은 항상 계획으로 그친다는 것을.....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는 4월말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5월부터는 바쁜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질 텐데 더 이상 미루었다가는 가을이나 가능할 것 같았다. 4월 27일로 날을 잡고 날씨가 맑기를 기원했다. 그 동안 걷기 운동을 통해서 꾸준히 다리를 단련하지 않았던 것이 사뭇 걱정스러웠다. 걱정만 하고 있다가는 성곽길을 걷지 못할 것 같아서 4월 27일을 마지노선이라고 혼자 선언했다. 막상 그 전날이 되니까 일주일만 더 미룰까? 난 성곽길에 대해서 주의사항이나 다른 정보들을 충분히 모으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더욱 불안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만 일을 해왔던 나의 수동적인 성향이 의식을 지배해갔다. '너무 소심해 누구보면 걸어서 전국일주나 세계일주는 하는 줄 알겠다.' 이런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잠에 들었다. 출발 당일날 아침은 맑았다.


  오전에 처리해야할 일이 있어서 학교에 다녀왔다. 그리고 11시에 다시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12시에 집을 나섰다. 썬크림 잔뜩 바르고 뿌리는 썬크림까지 챙기고 모자, 추상화된 성곽지도과 비상 식량인 식빵에 쨈을 발라서 넣고 출발했다.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에 도착했다. 8번출구로 나와서 한 블럭 걸어서 숭례문에 도착했다.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숭례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 방향은 시계방향으로 잡았는데 이유는 태양을 등 뒤에 두고 걷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커먼 나의 얼굴을 위한 계획이다.


(시작하자마자 찍은 성벽)


   처음에는 정동 근처여서 쉽게 생각했다. 일단 평지였고 간혹 휴일에 시립미술관 주위를 배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아 나갈 수 있었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소의문터를 지나, 배재학당을 근처에 도착했다. 무심히 외벽만 보고 지나쳤다. 이제 정동공원을 갔다. 공원은 그닥 짜임새가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근처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될 것 같았다.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다. 


(배재학당)

(정동 공원)


  다시 서둘러 발길을 재촉한다. 이제 서소문터를 지난다. 길 건너편에 돈의문터 글자를 씌여진 표식이 있어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돈의문터)


  역시 경교장의 외벽만 흘깃 보고 서둘러 인왕산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도심지를 벗어난다. 올라가는 코스로 들어서면 처음에 봤던 것과 유사하게 새로 만든 성벽을 만나면서 마음을 놓았다. 이제 성벽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느새 나타난 성벽에 마음이 놓인다.)

  다음 목표는 국사당이다. 산을 보면 오르막이 힘들기 때문인지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서 올라가서 이 오르막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인왕산을 바라본 적은 많으나 올라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항상 근처 안산 꼭대기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그 경치를 감상하곤 하였다. 안산은 자주 오르락 내리락해서 인지 우습게 여겨지는 산이다. 인왕산도 비슷하겠지 하고 올랐으나 오르면 오를 수록 낮은 산 치고 매우 거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많은 힘을 쏟아 붓게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땀이 비오듯 하였다. 모자 안쪽은 이미 땀으로 가득차서 바람이 곳을 보면서 모자를 벗었다. 시원했다.


(인왕산 초입)

(인왕산 산 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과거의 성벽 위에 새로 만들어진 성벽)

 

  햇빛은 작렬해서 더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움직이면 덥고 쉬면 추워지면서 기분이 서서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르막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그러다가 살짝 어지럽다고 느껴지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많은 힘을 쏟아부어서 그런 듯 했다. 7부 능선쯤에서 쉬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바람은 강하게 불어와 모자를 날려보낼 것 같았다. 정동에서 시작한 것이 독이 된 것 같다. 정동길을 보면서 쉽게 생각했다고 낮은 인왕산쯤이야 하고 생각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꽤 오래 쉰 것 같았다. 이제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끙'하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마지막이니 힘을 내면서 걸어 갔다. 바위를 계단처럼 깍아 놓은 것을 오르면서 미끌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운동화를 신고 오지 않은 선택은 탁월했다. 새 트래킹화가 있어야지 안심하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바위에 자잘한 모래가 뿌려져 있어서 미끌어질 수 있으니 인왕산 등산에는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물을 가지고 인왕산을 오르지 않은 것이다. 목이 말랐지만 내 가방안에는 물이 없었다. 평소에 물을 잘 먹지 않는 나인지라 별 생각없이 생수를 챙기지 않은 것이다. 산을 내려가면 무조건 물부터 사야겠다. 생각했다. '힘들다 목마르다'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걷다보니 드디어 정상이다.

(인왕산 정상)

  정상에서 도착하니 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것 같았다. 산을 내려가서 창의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갈까 고민하였다. 토요일 오후 집에서 편안히 누눠 책을 읽었다면 기분이 훨씬 좋았을까? 아니야 책을 읽으면서 느꼈을 나른한 기분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나의 체온이 오른 만큼 몸이 피곤한 만큼 나의 기분은 기분 좋을 만큼 떠 있으니까.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은 몸이 힘들어서 뛰는 것인지 아니면 흥분된 마음 때문인지 분간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도 현실은 현실이다. 몸이 피곤한 것이 마음 한 켠을 짓누르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페이스 조절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나를 위축시키는 것 같았다. 아직 성곽길의 4분의 1도 오지 않았는데, 출발한지 이제 경우 4km 남짓인데 벌써부터 지치면 앞으로 16km를 어떻게 갈까 걱정스러웠다. 정상에서 잠깐 쉬고 창의문 방면으로 길을 잡고 내려갔다. 날씨가 좋아서 사람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지 의무경찰인 것 같은 근무요원들이 인왕산에 잔뜩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창의문 가는 길을 물어보고 내리막길로 향했다. 오르막보다는 한결 여유가 생기면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인왕산 내리막에 만난 진달래)

(아름다운 풍경이기에 사진을 찍었건만 사진으로는 그저그랬다.)


  이제 산을 거의 다 내려올 시점에 시인의 언덕을 만났다. 점심먹고 산책 할 때 간간히 찾는 윤동주 시비에 적힌 서시를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서시 뒤에 적힌 시 "슬픈 족속"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거친 노동으로 피폐해진 삶을 꿋꿋히 살아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연상되어서 잠시 숙연해졌다.

(시인의 언덕에 있는 윤동주의 시 "슬픈 족속")


  시인의 언덕을 지나자 창의문이 보였다. 내리막길에서 여유를 찾은 탓인지 창의문을 본 반가움인지 아니면 이제 물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새로운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인왕산 내리막 막바지 길에서 건너 바라본 창의문)


  자하문로에 내려서자 마자 물을 찾았다. 물을 먹고 기력을 보충하고 나니 다시 앞으로 갈 힘이 생겼다. 잠시 쉬지 않고 곧바로 북악산 정상을 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갑 속에 있는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찰을 받아서 북악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북악산은 인왕산보다는 낮고 거칠지 않겠지하며 반드시 완주하고 말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신원확인을 하면 표찰을 준다. 하계에서는 4시(동계는 3시) 이전까지 이 곳에 도착하여서 6시 이전에 군사지역을 빠져나가야 한다. 벌써 시간은 2시 반을 넘은 시점이어서 쉬고 여유 부릴 수 없었다. 나무계단으로 된 오르막을 오른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경사가 점점 급해졌다.다 올라가서야 느꼈지만 북악산 정상까지 평지나 내리막길을 없다.

(북악산 나무계단 오르막길)

 

  계속 오르막이다. 게다가 경사는 점점 급해진다. 나중에 런키퍼에서 살펴본 이 때의 페이스는 시간당 1km 가는 속력으로 이동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쉬면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아서 천천히 발걸음을 떼면서 올랐다. 호흡 한 번에 발걸음을 한번 뗄 만큼 속력이 느려졌을 때야 정상에 이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인왕산에서 오버 페이스한 여파를 여실히 느껴야했다. 백악마루에서 잠시 서성대면서 휴식을 취한 후에 숙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와룡공원을 향하는 길이다. 내리막길이 계속되고 괴롭고 힘들었던 마음은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다. 숙정문에 도착하고 잠시 성문 밖을 나갔다가 와룡공원을 향해 계속 걸었다. 벌써 시간이 3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반 정도 왔는데 시간을 제법 지체한 것 같았다. 서둘러 동대문을 향해서 피치를 올렸다. 경치를 충분히 구경할 여유는 없었다. 그냥 눈이 닿는 곳만 살펴보면서 계속 갔다.

(와룡공원 인근 우수조망소에 성북동을 바로보고 찍은 파노라마 사진)


  와룡공원에 다다랐다. 풍광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중간에 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조용히 하늘에, 다닥다닥 붙은 동네에 눈길을 주었다. 하늘은 고요했다. 산동네도 고요했다. 사람의 흔적, 자동차의 흔적은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아서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 사람들의 분주한 일상이 연상되었지만 눈앞에는 펼쳐진 교묘히 결합된 자연과 인공의 풍광에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여분이 지나있었다.

(와룡공원을 지나 성북쉼터를 향해 가는 길)

   배가 많이 고파 왔다. 가방 안에 있는 쨈 바른 빵을 먹고 싶었지만 손이 더러웠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다. 지나면서 수도가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계속 걸어서 성북쉼터를 지나면서 다시 도심지로 들어섰다. 이제 또 긴장이 되었다. 성벽 유실 구간이었다. 어디로 갈까 하면서 고민하고 있는데 주차요원 한 분이 보여서 여쭈어 보니 친절히 성곽길을 알려주었다. 만약 혼자 찾아야 했다면 들어서지 않을 골목길이 성곽길이었다. 돈까스집 옆으로 난 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다행히 성곽길이라는 표식을 벽에서 볼 수 있다. 잘 찾아야 한다. 그걸 보면 다시 안심하게 된다. 경신 고등학교 담벼락을 돌아서 성곽길이라는 표지를 보아가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도시설을 찾아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배는 열심히 고프다고 소리를 내었다. 얼른 빵을 먹어야겠는데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계속 주택가 골목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혜화문에 다다랐다. 혜화문을 지키는 건물 옆에 수도시설과 차양 파라솔을 발견했다. 관리하시는 분께 여기서 빵 좀 먹고 가도 되나고 하니까 먹고 가라고 했다. 물을 틀어서 손을 꼼꼼하게 씻고 테이블에 앉았다. 시간은 벌써 4시 40분을 찍고 있었다. 눅눅한 빵이 싫어서 빵을 프라이팬에 살짝 구어서 쨈을 발랐는데 쨈의 영향 때문인지 다시 빵이 눅눅해져 있었다. 하지만 엄청 맛있었다. 

(빵, 물, 모자, 그리고 칼슘약통, 창의문에서 산 물이 아직 3분의 1이상  남았다.)


  많이 지친 게 느껴졌다. 허겁지겁 먹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지친 몸을 편안히 의자에 기대었다. 낮에는 창창한 해 때문에 더웠는데 날이 기울기 시작하고 가만히 앉아 있자 급속히 몸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손을 벌써부터 냉기가 느껴져서 힘들더라도 이대로 멈춰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먹고 관리인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낙산공원을 향해서 이동했다.


(낙산 공원 인근 성벽)


  혜화문을 지나 낙산 공원을 가는 길은 큰 길만 지나면 금세 평화로운 길이 나타난다. 하루의 긴장을 풀 수 있는 아주 좋은 산책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근처에 사는 분들은 산책을 많이 하셔서 건강할 것 같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싶었다. 낙산공원에 도착했다. 좋은 날씨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이 많았다. 머물러서 쉬고 싶었지만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특히나 남산 N 타워가 눈에 들어오니 더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동대문을 향했다. 대학로 인근이어서인지 커플들이 중간에 많이 보였다. 평소 같으면 부럽다하고 배아파하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프고 종아리가 당겨오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날이 쌀쌀해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성곽길 여행을 서둘러 마쳐야 했다. 잠시 쉰다면 나도 모르게 집에 가는 지하철이나 버스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인상적인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동대문 인근 성곽)


 이제 동대문이 보인다. 다시 도심지다.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아래쪽에 있는 이간수교를 대충 살펴보고 광의문을 향해, 장충동 쪽으로 향했다. 도심지를 걷고 있다. 성벽은 보이지 않고 골목길을 지나간다. 성곽길 표지를 골목길 혹은 지하철 역 등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도중에 길을 잃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을 해서인지 다리의 통증은 자연히 잊었다.  공사 중인 장충체육관을 지나고 남산 오르막 초입이다. 걱정이 시작된다. 오늘 넘어야 하는 가장 낮은 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르막을 200미터 가까이 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시 마음을 짓눌렀다. 가까스로 뱐얀트리클럽을 지나고 해오름 극장을 거쳐 본격적으로 남산을 오른다. 이번에도 나무로 된 계단이다.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북악산 오르막길이 생각난다. 돌계단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지 모른다. 그래도 좀 푹신푹신한 느낌은 드니까. 남겨두었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을 차례다. 느리지만 단단한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서울 N 타워가 눈 앞에 있다. 거의 다 왔다. 엄청난 중국인 관광객 인파를 뚫고 마침내 남산 정상에 올랐다. 서울에 십 수년을 살면서 한 번도 올라와 보지 않았던 곳이다. 감회가 새롭다. 비록 혼자 올라왔지만 그리고 피곤한 몸이지만 뭔가 가슴 속에 차오르는 감정이 들었다. 이제 힘든 고비를 다 넘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따뜻한 것이 가슴 한편을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 앞으로 이 곳을 다시 오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주위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내 옷은 얇았고 팔각정에서 쉬고 있으니 춥다고 느껴졌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계속 걸어야 한다. 피곤하지만 내 앞에 남은 길은 1-2km의 내리막만 있을 것이다. 숭례문 공략만 남았다. 내려오는 길에 안중근 기념관에서 잠시 길을 헤매고 시원해 보이는 백범광장을 지나니 마침내 숭례문이 보인다.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어졌다. 그냥 관성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콘크리트 내리막길이 좀 길었던 탓일까 다리를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후들거렸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시작점이자 도착점인 숭례문)


   마침내 숭례문이 앞이다. 도착. 시간은 7시 50분, 12시 반에 출발했으니 대략 7시간 20분 정도 걸었다. 총 거리는 21km 전체 페이스는 한 시간에 3km 걷는 속력이다. 해가 거의 지고 있었다. 숭례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얼굴을 살며시 미소가 머금어졌다. 뭔가 해내었다는 기분에 도취되었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목이 많이 말랐다. 트럭에 과일을 파는 아저씨를 만났는데 작은 참외를 싸게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에게 참외 5,000원치를 샀다. 목이 말랐는데도 바로 먹을 수 있는 물보다는 과일을 샀던 이유는 목이 마른 것 못지 않게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총 소비 칼로리는 1,500cal로 쨈 바른 빵으로는 채우기에는 어림없는 양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이 물보다 먹고 싶었던 것이었다. 





  남들이 보면 우습겠지만 21km를 걷고 났더니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중간 중간에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집에 갈까? 라는 회의에 대해 반박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리가 아프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하지 않아도 될 것을 미련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이 가졌던 것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뭔가에 자꾸 도전하는구나라고 깨닫을 수 있었다. 미지의 나를 찾고 기존의 나로부터 깨어나는 하루였다. 평소, 나를 잠시 쉴 새도 없게 몰아대던 서울 한복판에서 나는 나의 속도로 다른 서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안했다. 정신없고 에누리 없는 서울의 모습만 보아왔던 것이 미안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겠지만 나의 생각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면 모든 사물이나 장소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 동안 난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선입견에 사로 잡혀서 서울 밖의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인색한 서울의 모습을 서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다녔던 것을 반성했다. 난 서울에 10여년을 살면서 이런 서울의 모습을 만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다양한 모습의 서울을 발견할 수 있게 난 앞으로도 서울을 계속 걸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배재학당, 경교장 등 제대로 보지 못한 곳을 한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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