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좋아하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더운 여름 날 너무 졸렸던 수업이 끝나자 마자 엎드려 자기 시작하면서 매점 가는 친구한테 차가운 캔커피를 부탁하곤 했다. 땀을 흘리며 쪽잠을 자다 깨서 마시는 네스카페 캔커피의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소위 '원두커피 전문점' 열풍이 불었다. 지금까지 마셨던 캔커피니 맥심이니 하는 것들을 단숨에 '한 단계 낮은' 커피로 만들어 버린 이름이었다. 사실, 그 커피가 월등히 맛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대학생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가 아니라 그 기분을 사기 위해 들락거렸다.
대학생이 된 후 몇 년 동안은 커피 공백기 같다. 별 기억이 없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이라면 커피메이커를 산 일. 파란색 캔에 든 맥스웰 블루마운틴 블렌드 분쇄 원두를 수퍼에서 사다가 커피를 내렸다. 누추한 하숙방에 퍼지던 커피향은 자못 감동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원두도 그리 고급은 아니었을 테지만) 커피가 이렇게 향기로울 수 있다니, 하며 놀라워 했다. 하지만 신혼부부 혼수 중 가장 먼저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명성(?)에 걸맞게 내 커피메이커도 오래지 않아 그 신세를 면치 못 했다. 원두 찌꺼기 처리와 주기적인 세척을 하기에 너무 게을렀던 탓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세한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서 병역특례 생활을 시작했다. 회사가 잘 나갔던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들을 잊지 못 하는 사장님은 모든 면에서 서툰 병특 개발자들을 답답해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때 나오지 않는 월급이 답답할 뿐이었다. 이때 청량제 역할을 했던 게 스타벅스 여의도점의 커피였다.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커피 음료들이 무척 새롭기도 했거니와 스타벅스 매장이 서울 시내에도 몇 개 없었던 때여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소위 '된장질'이었던 셈이다. '팍팍한 현실로부터 그런 식으로 도망치려 했다니' 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동안 사그라들었던 커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는 계기는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관심은 꽤 오랫동안 스타벅스와 커피빈에 머무르고 말았다. 평소엔 스타벅스, 좀 진한(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건 진하다기 보다 쓴 맛이 강한)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커피빈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 좀 다른 커피 세계가 있다는 걸 다른 부서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남들보다 늘 일찍 출근했던 그분은 '커피미학'이라는 곳에서 원두를 사다 수동 분쇄기로 갈아 직접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사무실을 은은하게 채우는 향기가 근사했다. 스타벅스나 커피빈 매장의 향기와는 뭔가 달랐다. 한 잔에 6~7천원 하는 커피가 있다는 것도, 원두를 매장에서 볶는 곳이 있다는 것도, 그걸 구입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하지만 왠지 그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사치스럽다는 인상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 직장을 두 번 옮겼다. 마지막 직장이었던 곳은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몹시 지루했다. 돌파구를 찾든 신선한 자극을 찾든 했어야 했는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게을러졌다. 이럴 바에야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나만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움텄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그보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로 계속 미루기만 했다. 광화문 성곡미술관 앞 '커피스트'의 주인인 조윤정 님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온 건 그즈음이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인지 알 수 없지만 작은 울림을 주는 글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시절 우연히 커피 로스팅을 배우게 됐고 귀국 후에도 순탄치 않은 삶이었지만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이야기. 조금 뻔한 내용이었지만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데 가진 게 없어서 두려워. 내 전공과 커리어는 살리고 싶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아' 이게 얼마나 배부른 푸념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인지 일깨워줬달까.
회사를 그만둔 것은 이 인터뷰를 읽은 뒤로도 한참이 지나서였지만 커피스트는 곧잘 찾아가곤 했다. 신문로 뒷길의 한적함도 좋았고 테라스의 정취도 그럴싸했다. 조금 비쌌지만 커피를 계속 리필해 주는 걸 감안하면 가격 면에서도 프랜차이즈 커피숍보다 나았다. 그곳이 마음에 들어 드나들다 보니 '원두를 매장에서 직접 볶아 손으로 내리는 커피집이 또 없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겼다. 그런 곳들을 취재한 책도 참고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곳이나 귀동냥으로 알게 된 곳을 메모해 뒀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가 보곤 했다. 이런 가게들은 유동인구는 적지 않은 지역이되 임대료가 비싸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기 마련이라 평소에 지나다니지 않았던 동네와 골목길을 탐험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렇게 발품을 팔아 찾아가는 과정까지 즐기다 보니 설령 커피 맛이 별로였더라도 크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다만 가격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거나 마음이 지쳐 호사를 누리고 싶을 때가 아니면 커피 한 잔에 5~6천원을 선뜻 지불하기가 망설여졌다. 직접 내려 마시는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로 했다. 볶은 원두 100그램이면 6잔 정도를 만들 수 있는데 가격은 6천원에서 8천원 정도였다. 좀더 많은 양을 싸게 파는 온라인 쇼핑몰도 있었지만 볶은 원두는 쉽게 산화하는 성질이 있어 맛과 향이 나빠지기 때문에 조금 귀찮더라도 매장에 가서 사 왔다.
장비는 손잡이를 잡고 돌려 원두를 가는 원통 모양의 분쇄기, 종이필터와 커피를 얹어 우려내는 깔대기처럼 생긴 드리퍼, 물과 커피의 양을 가늠하는 데 필요한 유리주전자(서버) 정도로 시작했다. 입이 작고 목이 긴 주전자도 갖고 싶었지만 이게 은근히 비싸서 집에 있는 전기주전자를 쓰기로 했다.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커피 쪽도 도구나 장비가 정말 다양하다. 디자인이 예쁜 것들도 많다. 물론 가격도 그만큼 비싸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 일을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진 탓에 장비 욕심은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 되었다. 소박한 도구만 있어도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좋은 맛을 찾아낼 수 있다.
가끔은 남이 만든 커피를 사 마시고, 그보다 자주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는 동안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은 거리를 점령했다. 빵집, 패스트푸드점, 도넛가게에서도 커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편의점에서 파는 커피 종류도 부쩍 늘었다. 물론 개인이 운영하는 커피집도 많아졌다. 최근에 문을 연 곳에 가 보면 커피의 원산지뿐만 아니라 농장 이름까지 함께 적힌 메뉴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낸 그 가게만의 블렌드(blend)를 갖고 있기도 하다. 오로지 커피만 파는 집이 있는가 하면 칵테일이나 유명 과자점의 디저트가 포인트인 곳도 있다. 한 쪽에서는 커피가 물만큼 흔한 음료가 되어 가고 다른 한 쪽에서는 쉼 없는 고급화와 차별화가 벌어지고 있다. 커피마저도 양극화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럴 때일 수록 내 취향이 어느 쪽인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잘 볶아진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의 복잡하고 오묘한 맛을 좋아하는 건지, 새롭고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즐거운 건지, 일상을 잊기 위해 커피숍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 찬찬히 따져보는 거다. 이 글도 그런 고민에서 시작됐다. 첫 글은 커피에 대해 써야겠다는 건 쉽게 결정했는데 '나는 커피를 왜 마셔왔던 거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이참에 이 취향의 궤적을 한 번 짚어봤다.
글로 정리하다 보니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보다 커피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커피를 그저 소비하고 도구 삼던 쪽에서 발견하고 즐기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는 커피 노트도 쓰고 있다. 커피 맛 보는 수업 같은 데서 공식적인 표현(이를 테면 말린 자두 향, 견과류 맛)을 경험하고 배운 적은 없지만 한 모금씩 마시면서 전체적인 인상과 도드라지는 맛을 적는다. 이렇게 하다 보니 커피에 좀더 다가가는 느낌과 함께 커피와의 여정이 앞으로도 길게 이어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든다. 왠지 마음이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