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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완성체 - 평화시스템

  품속에 아들의 모습이 담긴 종이를 넣었다. 심호흡을 하라고 그의 내부가 소리쳤다. 몇 번의 긴 숨이 오고가자, 차츰 진정되었다. 수명은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는 정면에 있는 붉은 색 버튼을 누르려 늙은 몸을 이끌고 다가갔다. 침침해진 수명의 눈에도 새하얀 벽면의 빨간색은 시야에 쉽게 들어왔다.

  천천히 버튼을 누르자, 방 중앙 천장에서 직사각형의 하얀 것이 거꾸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벽면과 똑같은 재질로 그 끝에는 컴퓨터 화면이 꺼진 채로 달려 있었다.

  수명은 아무런 소리 없이 내려오는 그것을 돌아보았다. 덕분에 소름 끼치는 정적은 유지되었다.

  그것이 다 내려와 멈추자 컴퓨터 화면 앞바닥에서는 철제 의자 하나가 솟아올랐고, 그 왼편에는 나무로 된 관이 시간차로 올라왔다. 수명은 걸음을 떼어 자리에 앉았다. 센서가 발동해 코앞에 있는 화면이 켜졌다. 하얀 화면 오른쪽 구석에 ‘2552년 10월 13일’ 이라는 녹색 글자가 선명했다.

  몇 초 지나자, 화면 중앙에 사각 박스가 그려졌고, 그 안에는 황금색 글자가 채워졌다.


  『평화 시스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의 시스템은 RUSAA 연방에서 개발되고 도입 되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행되었고 그 역사는 24세기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수명은 120세로 제한되며 그로인해 120세 생일까지로 법적 생존 제한 기간이 정해졌습니다. 우리의 시스템은 그 법을 어기지 않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시스템에 참가하는 인원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은 이들과 새로 태어날 이들에게 새 생명을 전해 줄 것입니다.』


  그 글자들은 사각 박스를 가득 채우고 나서 다른 것들로 바뀌었다.


  『아무쪼록 이용자 분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저희가 준비한 여행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여정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사각박스는 글자들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하얀화면만이 남았다.

  노인은 굳이 이 설명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100세를 넘길 때부터 이 시스템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었다.

  수명은 떠오른 빈칸들에 개인 정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국가, 이름, 시민코드, 마이크로칩 번호, 주소, 보호자의 이름, 보호자의 시민코드 등을 차례로 입력하자 입력한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그가 확인 버튼에 손가락을 서서히 가져가자, 120년 살아온 인생이 머릿속에서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6살, 아버지와 단 둘이 열권 관광을 했던 것이었고, 처음 사이버 학교를 입학 할 때, 9학년에 첫 사랑을 만난 일, 2년 뒤 졸업식도 스쳐지나갔다. 대학교를 포기하고 유비쿼터스 시스템 부품 회사에 취직해 첫 월급을 받았던 당시도 떠올렸고, 뒤늦게 나이 마흔에 대학을 들어가 그곳에서 현재 부인을 만나 첫 눈에 반한일도 생생했다. 그리고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 찬란하게 빛났다. 몇 년 뒤 아들을 얻고 눈이 축축 해졌고, 책임감은 어깨를 짓눌렀다. 딸을 낳았을 때에는 더했다. 그녀는 마치 등 뒤에 두 날개가 붙어 나온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차근차근 영사기를 더듬어가다 그가 일흔 살이 되었을 즈음에 노인은 버튼을 눌러버렸다. 기억의 편린이 산산이 흩어졌다.

  화면은 전환되었다. 신원이 확인 되었으며 여러 절차에 관한 선택사항을 결정하는 항목이 나타났다.

  먼저 뇌 속에 박혀있는 마이크로칩의 처리 방법이다.

  칩은 수명의 또 다른 생애였다. 기쁘고 슬프고 즐거웠던 일들, 부끄럽거나 자랑스러운 일등과 그가 접촉하고 교신했던 이들, 자주 사용했던 전자기기 따위의 정보가 담겨있었다. 그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직계 비속들에게 정보 전송 후 칩은 재활용하기로 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개인적이고 민감한 부분을 공개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있다.

  다음 화면은 사망 후 시신처리 방법이다.

  박테리아로 분해하거나 냉동 후 우주로 보내는 방법이 유행이었으나 그는 화장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했다.

  화장 버튼을 누르며 죽은 몸이 불에 타는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런 느낌이 없길 바랄 뿐이다

  다음으로 넘겼으나 기계가 잠시 에러를 일으킨 모양이다. 화면이 여전히 로딩 중이다.

  수명은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았다. 에러 난 곳은 없었다. 그는 배가 푹 꺼질 때 반근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 과격한 운동은 불가하지만 남들에 뒤처지지 않게 걸어 다닌다. 웬만한 시사상식은 50대 젊은이들보다 낫다.

  컴퓨터 화면이 돌아왔다. 『사망 방식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라는 문구가 가슴을 찔러왔다.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다시 긴 호흡을 내뿜었다. 놀란 가슴을 들숨으로 어루만지고 가스 투입 항목을 눌렀다.

  50여년 전 먼저 죽은 아내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 옆으로 아들과 딸, 그리고 볼수록 마음이 찢어지고 아픈 막둥이의 얼굴도 스친다. 싸늘하게 식은 그에게 힐난하며 울부짖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선택사항의 마지막 4/4 화면 페이지가 등장했다. 유언을 남기기로 한다.

  화면 아래 펜 모양의 막대를 홈에서 빼내었다. 하얀 화면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해두었던 것들을 적어나갔다.

  처음에 상투적인 말로 시작했다가 식상해 지워버렸다. 자질구레한 표현들은 모두 빼야겠다.


  『나는 ‘평화시스템’에 참가했다. 소름끼치는 정적이 인상적이다. 왜 평화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만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정말 평화롭다.』


  1시간여 뒤면 유명을 달리하는 자신을 다 잡기 위해 ‘평화’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꾹꾹 눌러 적었다. 물론 ‘평화시스템’의 진정한 기원은 잘 알고 있었다.

  23세기 초 EU와 아프리카는 ‘AEU’라는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경제활동과 군사력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그에 비례해 세계에서의 영향력도 거세졌다.

  위기를 느낀 미국과 아시아는 ‘AEU’에 대항하는 새로운 연방을 만들어 낸다.

  이른바 ‘Republic of USA & Asia’ 가 그것으로 멕시코와 남미, 중미 일부국가와 오일 파워를 지닌 중동의 다수 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속된 대규모 연방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동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부를 가진 다수의 국가라고 보는 편이 더 맞아 떨어졌다.

  ‘평화 시스템’은 이 RUSAA 연방의 산물로 인구 조절을 통하여 자원의 낭비를 막아 AEU를 견제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23세기 말 당시 RUSAA 연방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스날 자넬’은 성경에 쓰여진 ‘너희의 수명은 120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리라’ 라는 야훼의 말을 빌려 120세의 법적 제한 수명을 역설 하였다. 이듬해, 제한 수명 법령은 발휘되었고, 반작용으로 시민단체와 고령 가족을 포함하고 있는 이들은 헌법 위반을 표방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식량난과 인구 포화로 신음하던 그때의 상황에 의하여 소수의 의견은 냉정하리만큼 묵살되었고, 결국 암묵적인 다수의 동의로 법령은 완성되었다.

  120세 생일을 넘기게 되면 그는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 연관된 모든 것은 삭제되고 자동으로 사망 처리된다.

  노인은 어떤 식으로든 죽어야 한다. 만약 그때까지도 그가 생존해 있다면 부양하는 가족들은 엄청난 벌금을 물고, 죽을 이는 끌려가 원치 않는 방법으로 죽게 된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범법 행위가 빈번해지자, 사건을 방지하자는 이유로 무료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평화 시스템’이 그것으로 120세가 되도록 자연사하지 않은 이들을 처리케 해주었다.

  수명은 유언쓰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내 삶에 한 점 부끄러움 없다. 깨끗이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올곧은 성격과 배려는 나의 장기였다. 따라서 떠나는 것에 후회는 없다. 다만 우려하는 것은 나의 아이들과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된다는 것이다. 슬퍼하지 마라. 사람은 다른 이들과 맞춰가야만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사람은 체제에 맞춰가야만 살아갈 수 있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은 담담히 받아들였을 때 아름다운 법이다. 구차한 모습을 보일 필요 없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이고, 나의 사람들도 그러길 바란다.』


  간략한 글을 끝맺자 다음단계가 진행되었다.


  『개인정보 및 관련 자료를 모두 삭제할 것을 요청 중입니다.』


  고개를 끄덕 세 번하자,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다. 설령 시스템이 잘못되어 탈출한다 하더라도 투명인간 내지는 혼을 담고 다니는 시체에 불과 할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옷을 모두 벗어 놓았다는 느낌일지 무언가 홀가분했다. 무슨 일을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세상은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 어떤 것이든 용서를 해줄 듯싶었다. 노인답지 않게 생기 있는 용기와 젊은 투지가 쑥쑥 솟았다가,


  『잠시 후 가스 투입이 시작 됩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착 가라앉았다.

  메시지가 스르르 없어지는 것을 보니 드디어 시작되려나보다. 아직까지는 조용했다. 눈을 감고 기다렸다. 고통 없이 얼른 마쳤으면 좋겠다.

  사방 벽면에 미세한 구멍들이 생겼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은 치익 하는 연기 소리에 의해 해체되었다. 수명은 미소 지었다.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몇 번 끄덕 후 일어났다.

  나무관의 문을 열었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맸다.

  그는 차분히 심연 속으로 몸을 놓았다. 바닥은 있었다. 다리를 쭈욱 뻗고 앉았다. 품안에 간직한 종이가 바스락 대었다. 이미 세 번이나 시청한 아들의 편지를 다시 꺼내었다. 결대로 종이를 펴내자 거기엔 아들의 모습과 소리가 담겨있었다. 그는 네 번째로 그것을 재생했다.


  「마지막으로 떠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네요.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말씀에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속으로 울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버지 딸과 손자들도 슬픔에 잠겨 오랜만에 저희 가족은 조용한 가족 모임을 보냈습니다. 50여년 전 그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네요.

  주위 사람들도 같이 괴로워하며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나누고 있습니다. 언제나 본인보다는 남을 위해 살아온 이타적인 삶. 그 누구도 잊지 못할 겁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새로운 곳으로 떠나시면 모든 마음의 짐 훌훌 털어버리시고 편안히 계세요. 그때의 기억도 모두 지워버리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버지의 잘못은 조금도 있지 않아요. 먼저 가 계시는 어머님과 막내에게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어디를 가시던지 언제나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것 잊지 마세요. 당신은 제게 최고의 아버지셨고, 스승이고, 완벽한 이상향이셨어요. 못난 아들 이곳까지 이끌어 주시고 내려주신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종이에 기록된 아들의 영상은 검은 화면이 되어 정지되었다.

  영상에 고정됐던 시선을 돌리자 내부에 연기가 점점 더 자욱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정신은 또렷했다.

  수명은 마이크로 칩을 돌려 기억에 저장되어있던 그때의 기록을 끄집어냈다. 눈앞으로 영화를 보듯 영상이 하나 재생된다.




  일흔 살의 젊은 수명과 그의 아내는 요즘 초조하기만 하다. 막내의 자취를 파악한 인구억제부 정부 관료들이 벌써 한 달 동안 열 번 가까이 들쑤시고 갔기 때문이다. 셋째 이상의 자손들을 남기는 것이 불법인 사회는 그 어떤 것보다 이 법을 엄정히 다루고 벌했다. 그들은 쳐들어 올 때마다 집안을 뒤지는 것은 물론 그들과 관련된 정보도 모조리 털어갔으며 심지어 사이버 공간 감시를 위해 해킹까지 했다. 때문에 그들은 막내아들을 멀리 보내고, 서로의 모든 정보를 삭제하는 등 그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거대한 정부의 정보 바다 앞에서 그들의 몸부림은 그저 한낱 빗방울에 불과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신을 차려보면 모든 트릭은 간파 당한 후였다.

  눈치를 보던 그날도 불안한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다.

  저 멀리 푸른 하늘에서 굉음을 내는 플라잉 카 한 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색 금속은 곧 화단에 검은색 그림자를 심으며 천천히 하강했다. 검정 자켓과 흰 셔츠로 이루어진 한 벌의 정장을 걸친 훤칠한 사내 두 명이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또 무슨 일 입니까?


  수명은 떨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당당하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생각을 하는 사람인 이상 우리가 방문하는 이유는 딱 하나 뿐인데 모를 수가 있을까?


  둘 중 좀 더 키가 큰 사내가 씨익 웃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 입니까? 그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죠. 얻은 게 없다니요.


  그는 칩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보였다.


  여기에 뭐가 들었는지 조만간 알려주죠.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죠? 이제껏 잘 숨겨온 당신의 아들, 검거하는 일만 남았다 이 말입니다.


  또 다른 사내가 말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본 줄 아십니까? 분명 어디에 숨겼거나 도망 보냈겠지.

  어디서 헛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맹세컨대, 당신들이 알고 있는 인원이 전부요.

  아니.


  그들은 점점 다가와 집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요.

  아무튼 나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겠소.

  못 참는다고요?


  둘 중에서 좀 더 키가 작고 입이 약간 째진 사내가 수명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이마를 들이 밀었다.


  못 참으면? 못 참으면 어떻게 할 건데?


  수명은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불안감과 분함이 겹쳐져 복합적인 감정이 폭발했다.


  고소할거야 당신들!


  수명은 분에 못 이겨 소리쳤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고소할거야! 왜 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데? 대체 왜? 아니라잖아? 잊을만하면 찾아와서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가는 당신들 때문에 마음 편히 지내는 날이 없어. 알아?

  여보 진정해요.


  아내가 울상을 지으며 말렸다.


  고소? 그래 말 한 번 잘하셨네. 어디 한 번 해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상황판단이 잘 안되시나? 이봐요. 당신들은 지금 잠정적 중범죄자들이야. 인원 은닉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는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런데 뭐? 오히려 우리를 고소한다고?


  그는 목을 슬쩍 뒤로 튕기고는 피식 웃었다.


  기가차서 말이 안 나오는군.

  죄송합니다. 얼른 들어가세요. 이이가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아내가 수명을 끌어안으며 말리자 수명은 더욱 더 목소리가 커졌다.


  조심해. 언제부턴가 여기 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갈등이 생기는데, 매번 이러면 우리도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아.

  . 주의 할 테니 빨리 끝내주세요.


  아내가 밀어내듯이 말하자, 키 큰 사내가 기분 나쁜 미소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럼 오늘도 실례 좀 하겠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수명은 이를 갈았고 아내는 눈물을 보였다.


  괜찮겠죠?

  괜찮을 거야. 똑똑한 아이니까 잘 하고 있을 거야. 얼마 전에도 하루에 세 번씩 정보 초기화하고 위치 혼란 시켜 놓으라고 당부해놨어.


  수명은 속삭이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내의 울음은 점차 커졌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될까요?

  나도 몰라.


  수명은 아내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들이 말했던 대로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조사는 끝났다. 그렇지만 입이 째진 사내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보아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잘 숨기고 다니더군. 하지만 언젠가 실수 할 날이 오겠지. 불시에 다시 찾아 올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계시오. 그리고 혹여나 우리에게서 벗어 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은 애초에 버리는 것이 좋을 거요.

  안녕히 계십시오.


  키 큰 사내는 운전석 문을 열며 엄포를 놓듯 인사를 건넸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뿌리를 뽑아 뭉게구름 쪽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아내는 다시 울었다. 이번에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그날 밤 잠들어 있던 부부는 현관문이 열리는 기계음에 깼다. 암호화되어 있는 출입문을 열 수 있는 것은 가족들과 정부관계자들 뿐이었다. 한밤중 몰래 들어온 것을 보니 후자 인 것 같았다. 수명은 대충 옷을 걸치고 수면을 방해하면서까지 쳐들어 온 것을 해명하라 요구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렇지만 밖에는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서있었다.

  부부의 막내 아이가 찾아왔다. 아들은 굳은 표정으로 수명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반가우면서도 깜짝 놀라 다그쳤다.


  「무슨 일이야.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기에 왔어?」


  그러나 막내는 아무 말이 없다.


  「언제 온 거야? 밥은 잘 먹고 다니니? 건강은 어때?」


  뒤따라 나온 아내가 급하게 물었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응? 그런 거야? 걱정 말고 다 얘기해봐. 어떤 일 이길래 이렇게 늦게 찾아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왜 온 거냐니까?」


  수명은 조급함에 언성을 약간 높였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애 놀래게.」


  그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용히 눈물이 흐르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통곡하려는 것을 억지로 참느라 꺽꺽 대고 있었다.


  「아버지! 절 왜 낳으셨나요..」

  「뭐?」

  「이 땅의 제도가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러셨어요. 제가 태어나면 안됐잖아요.」


  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아내 또한 그렇게 되고 있었다.

  수명은 숨이 턱 막혔다.


  「미안하다...」


  말을 건네야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단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없었다.


  「너희 엄마가 너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너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다.. 미안하다..」


  수명은 자신 또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느라 애쓰고 있었다. 수명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 대가가 뭔가요. 평생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살면서 짓지도 않은 죄책감과 늘 불안을 갖고 사는 거요?」


  수명은 혀가 굳었다.

  아내는 맨발로 나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적시는 아들의 두 손을 움켜쥐고 함께 울었다.


  「미안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아내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수명의 눈에도 습기가 차올랐다. 그들은 한참동안이나 울었다.


  「오늘 같이 있어도 될까요?」


  시간이 지나, 울음을 그친 아들이 묻자, 수명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들킬 거야.」

  「여보 그렇게 해줘요.」

  「또 올 거야. 그들이.」

  「최소한 하루 걸러오지 연달아 온 적은 없잖아요.」

  「그래도...」

  「확실해요 당분간 안 올 거에요.」


  고민 중인 수명이 아무 말 없자, 아내가 대신 허락해 주었다.


  「예전 네 방 아직 그대로니까 오늘 자고 가. 내일 아침에 엄마가 맛있는 것 많이 해줄게.」


  그러자 막내는 대답대신 벌떡 일어나 부부에게 큰 절을 올렸다. 절을 하고 아들이 입을 열었다.


  「저보다도 더 괴로우실 텐데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저는 그 누구보다도 불효자에요.」


  수명은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휘감아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다! 아니야. 얘야.」


  아내가 또다시 붉어진 눈을 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니요. 맞는 것 같아요. 어머니 내일 저 떠나면 그래도 지금처럼 행복하게 사실 거라고 약속 할 수 있죠?」

  「그럼. 그럼.」


  그들 가족 셋은 슬픔으로 오래오래 새벽을 보내었다.

  뜬 눈으로 지샌 수명은 다음 날 아침 보았다. 목을 매고 추욱 힘이 빠져 버린 막내아들을.

  그 자리에서 실신한 아내는 그 이후 몸져누워 버렸고 병상에 머무르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내와 막내를 보내던 날 수명은 통곡하며 아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제 어미를 잡아먹은 못된 놈이라며.




  수명은 다시 평화시스템에 있었다. 흐려진 시야가 가스를 마셔서 그런 건지 울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연기는 이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졌다. 시야는 흐려지고 숨이 막혀왔다. 그는 상체를 관위에 천천히 뉘였다.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느낌이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두려움은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아니 아무런 기분이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공허했다.

  뚜껑 문이 닫히기 전, 그는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다소 화려한 문구를 보았다.


  『당신의 120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문이 닫히자, 수명은 그 곳에 없었다. 수명은 모든 걸 다했다.

  수명은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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