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에 대전 출장을 다녀왔는데 그 날 친구와 함께 본 영화가 숨바꼭질이었다. 되도록 상업적 영화를 피하고 독립영화를 보고 싶은데 계속 되는 친구들의 약속에 때때로 상업영화를 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 다시 만났을 때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으리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빈틈을 잘 메울 수 있는 수단이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의 흐름을 보면 저런 일을 어떻게 가능하게 했을까 등의 조금은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지만 영화는 우리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편견들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많다. 전반부에서 영화가 전개되는 흐름은 관객들을 완전히 오해의 늪으로 빠트린다. 어린 시절 입양아인 주인공 손현주는 부모님의 친 자식인 그의 형을 모함함으로써 가족의 중심적인 위치로 올라서고 끝내는 부모님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버린 듯 하다. 그의 형은 피부질환까지 있어서 타인에게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준다. 이런 형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그의 동생의 한마디 말로 주변 사람들은 쉽게 믿게 된다. 즉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열등하고 악한 짓에 쉽게 벌일 수 있으리란 편견을 꼬집고 있다. 이런 비슷한 예는 손현주 가족이 처음으로 형이 살던 일산의 낡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정신지체 장애를 앓는 듯한 남자의 등장에 손현주의 부인은 물론 관객 모두 아이를 납치 유괴한 인물이 그 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도 감독은 절묘하게 넣어두었다. 전반부의 이야기 흐름 상 손현주 가족 위협하는 존재로 실종된 그의 형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이것에 따르면 장애가 있는 형이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로움에 지쳐서 그의 동생 가족에게 복수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가 아닐까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장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나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에게 우리 모두 어떤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되새겨 준다. 나 또한 그런 감독의 의도에 놀아났던 것 같다. 감독은 그런 편견을 가진 나를 당혹스럽고 부끄럽게 한다.
손현주는 지나치게 깔끔을 떠는 강박증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 그의 형을 모함하고 나서 죄책감에 생긴 마음의 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는 죄책감을 씻는 방법으로 자신의 주변을 지나치게 청결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긴장감이 몰아칠 때마다 유리컵을 닦는다든지 바닥에 떨어진 오물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형이 집으로 침입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꿈을 자주 꾼다. 그리고 그 답지 않게 죽은 형의 아파트에서 뭔가 계속 알아보려고 하는 행동 또한 자신의 죄책감이 동기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형의 실종 후에 형이 살던 낡은 아파트의 짐들을 사람을 시켜서 처리하라는 그의 아내 말에도 무시하고 사건의 핵심으로 그를 유도하는 것은 죄책감 혹은 형과의 끈질긴 악연의 고리가 끊어졌는지 확인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니 말이다.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내는 흐름은 훌륭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혈육간의 원한으로 이야기 흐름을 가지 않게 함으로써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었다. 극 초반에 뻔한 스토리가 반전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안전한 느낌이란 것이 무엇인가이다. 자본주의가 완전히 정착한 사회는 자본의 양에 의해서 계급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근거 있는 혹은 근거없는 위협에 노출된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가진 자들은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해 줄 보안시스템을 도입하게 된다. 도어락을 두 개 세 개씩 달고 자신의 주거지 주변을 CCTV로 모니터링을 하고 경비를 24시간 근무 서게 하고 더 나아가서 지문인식, 동공 인식 등 각종 보안 장치들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안전장치 뒤에 숨어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영화가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도 범인이 차례차례 안전망을 깨고 진입할 때마다 그 위협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현대인이 느끼는 가장 큰 위협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도 저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안전장치들은 모두 정전이라는 위기에 무장해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김중혁 소설 "1F/B1"에서도 단 24시간의 정전 후 잘 운영되던 도시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폐해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현대인은 이런 슬픈 상황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우리를 안전하게 해 주는 것은 비싼 보안 장치나 24시간 경비인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이것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핑계로 혹은 개인의 이기심이 완전히 정착해 버린 자본주의하에서는 그 때 그 때 문제만 해결하는 식의 땜빵질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작은 위기에도 쉽게 흔들리는 사회로 전락해 버릴 우리의 미래가 떠오른다. 대안이 있다면 빈부 격차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빈부 격차의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방사성 폐기물의 비용을 전력 생산의 비용으로 간주하지 않는 원자력 발전소의 그것과 유사해 보인다. 이것은 FTA를 체결하면서 국내 이해관계를 처리하지 않고 남겨두어서 사회적 비용을 증가 시키는 것과도 교묘하게 닮아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풍요로움이 증가하는 것은 이런 비용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역사를 진행시키는 방식이다. 그 끝은 어느 누가 예상하던 결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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