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목요일 대전 출장이 있었습니다. 평소 생활 리듬과 다르게 움직여서 그런지 많이 피곤해서 집에 와서도 글을 쓸 힘이 없어서 이제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친구의 추천을 받은 이 영화를 KTX 안에서 보았다. 나이가 들었는지 피곤해서 그런지 KTX에서 영화를 보면서 속이 울렁울렁거리며 오심을 느꼈다. 20대에는 부담없이 기차 안에서 책도 보고 영화도 봤는데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겼는지 점점 힘들어진다. 덕분에 전반부는 집중력 있게 보지 못했다. 어차피 한 시간 여행이라서 다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나머지 절반은 집에 와서 보았다. 그런 이유로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좀 더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1985년 동독, 슈타지(국가안보국) 소속인 대위 비즐러가 한 예술가의 생활을 감시하면서 겪는 감정과 생각의 변화이다. 슈타지는 요즘 우리로 따지면 국가정보원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동독 문화부장관인 햄프는 게오르그만의 애인인 크리스티나를 게오르그만에게서부터 떼어내어 자신의 정부로 만들려고 한 것 같았다. 이에 출세에 눈이 먼 그루비츠 대령이 햄프장관을 위해서 시인인 게오르그만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루비츠는 친구이자 부하인 비즐러에게 게오르그만(시인)의 생활을 감시를 지시하게 된다. 비즐러는 현직 심문자이면서 슈타지 요원을 배출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심문할 때 왜 잠을 재우지 않느냐?'라고 물어본 학생 이름에 체크를 하면서 부적합인물로 낙인을 찍는 듯 한 모습을 보이는 냉철한 인물이다.
이런 그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그 반전을 일으키는 부분이 납득이 잘 안 갔다. 무엇이 비즐러를 변하게 하였는가 그는 전에도 다른 사람들을 감시 도청을 하였을테고 그런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없이 차분히 일을 했을 텐데... 남들이 보면 가혹하리만큼 심문을 하는 것에도 불편해 하지 않았는데 왜 하필 이 시점일까? 연출가이자 친구인 예르스카를 끊임없이 신경쓰는 게오르그만의 인간미에 반한 것일까? 아니면 음모에 빠진 한 개인적인 불행이 비즐러로 하여금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했을까? 사실 비즐러가 변화를 일으킬 만한 어떤 직접적인 암시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전반부에 암시가 있었는데 KTX에서 봐서 그런지 놓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는 일이 차가운 비즐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니 조금은 의외라서 쉽게 납득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감독이 영화의 무게를 그 쪽에 둔 게 아니라 그 후반에 일어날 일들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묘사를 좀 더 세밀하게 해 주었으면 했는데 좀 안타까웠다. 내가 전반부에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주요요소였다.
이렇게 변한 비즐러는 그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호하기에 이른다. 게오르그만의 설득에도 장관을 만나러 나가는 크리스티나를 게오르그만에게 되돌려주고 게오르그만이 동독체제를 고발하는 글을 서독으로 전달될 수 있게 암묵적으로 도와 주기에 이른다. 그는 게오르그만의 생활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를 완벽하게 도와줄 수 있다. 심지어 게오르그만이 집 문턱 밑에 숨겨두었던 타자기마저 미리 숨겨주는 행동을 한다. 그로 인해 비즐러는 그루비츠의 신뢰를 잃고 더 이상 슈타지의 핵심인력으로 일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일보다 그는 게오르그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참으로 비참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용기있게 그 일을 과감히 던져 버린다. 그리고 4년 반동안 우편물 분류 작업을 묵묵히 해내게 된다. 사람을 악의적으로 감시하는 일보다 더 의미없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일이 비즐러의 의도대로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크리스티나의 자살로써 게오르그만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일은 끝장이 나고 만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보살피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알려주듯이 영화는 그런 결말을 지어 보였다. 훌륭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영화 앞부분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보았던 것을 모조리 보상하듯 하는 크리스티나의 자살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신선했다. 몰입도를 최대로 올려놓았다.
글을 마치기 앞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문제를 던지고 싶다. 비즐러는 게오르그만을 감시하다가 스스로의 인간성을 되찾기는 하지만 그는 분명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온 감시자이다.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필요이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그랬던 그가 통일 이후에 우편 배달을 하면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그를 마치 위대한 예술가를 지킨 사람으로 칭송하는 듯한 결말을 보인다. 물론 떵떵거리면서 큰 소리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 그가 뭐가 문제냐고,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CIA 요원이나 국정원 요원, 서독의 정보국 요원들 모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라고 한다면 할말이 많이 없지만 과연 통일 이후의 비즐러의 삶은 그렇게 순탄한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영화 '리더'에서는 나치치하의 단순 간수 역할을 맡았던 여인에게도 가혹한 칼날을 들이대었는데 그는 어떻게 보면 체제에 반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힘들게 한 단순 조력자 이상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아무런 처벌없이 살 수 있는 사회라면 난 정이 떨어질 것 같다. 그게 나치가 아니었고 동독의 합법적인 정권의 명령을 따라서 그랬다는 주장은 나에게는 설득력을 많아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 문제는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인권 유린이다. 2008년도에 미국 학회에 참석해서 만난 폴란드에서 온 젊은 친구는 2008년 올림픽이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열리는 것에 반대했다. 이유를 대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안나고 아마 그는 공산주의 국가를 비인권국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인권유린국가에서 세계평화의 상징인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거냐' 대충 그런 말인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국민들의 감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과거 혹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동독에 만만치 않게 많은 개인이나 반체제 인사를 감시하는 사건들이 있지 않았나? 이것은 정부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부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마치 동독이라는 특정 국가를 공산주의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일치시켜서 이해하면 편의적 역사인식과 다르지 않다. 우리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하고 이런 영화의 내용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로써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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