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아! 씨!” 차마 욕은 하지 못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 나 혼자 있는 데도 욕을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용기 따위도 없다. 시끄러워서 짜증이 났는데, 차마 화를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알람이 오늘 내가 시험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끔 길어지는 내 백수 생활에 왜 영어 시험을 그리도 많이 봐야만 하는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도 영어 시험을 꼬박꼬박 챙겨서 본다. 남들이 다 그 정도는 하기 때문이다.
맞다. 나는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아니 뛰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만 하지 않고 싶다. 내 삶에서 어떤 욕심을 부리면서 살았느냐 물어본다면, 아마도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아야 된다는 욕심을 가장 많이 부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것도 욕심이 맞는 것이겠지?
초,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아이들이 시험기간이 가까워져 시험 공부하는 척을 하면, 나도 따라서 공부하는 척을 했다. 나랑 친한 친구들이 시험 성적이 잘 나오면,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면서 그 친구를 따라잡으려고 애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절 정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내 주위에 없었다.
대학을 갈 때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말해도 잘 모르는 대학을 갔다. 그러자 사람들 앞에서 대학 이름 이야기 하는 것이 힘들었다. 마치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를 얕보는 것만 같았다. 아마 그 때 처음이었던 것 같다. 친구 이외의 사람들에게 뒤쳐지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마음을 크게 다잡았던 시간 말이다. 그 시간이 어쩌면 내가 이 영어시험을 매달 보도록 만든 기준점 인지도 모른다.
결국 남들이 들으면 고개를 끄떡거리며 알아봐주는 대학에 재수를 한 후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굉장히 편했다. 내 소개를 할 때 거리낌 없이 학교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날 봐주는 시선도 왠지 느낌이 달랐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겉으로는 학벌 타파하자고 외치는데, 실제 만나서 사람 대하는 것을 보면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았다. 다들 겉으로는 아닌 채 했다.
그리고 졸업할 때가 다가왔다. 대학 선배들의 이야기, 친구들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직장에 대한 등급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니 내가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알아버렸다. 직장에도 서열이 있고, 그 서열에 따라서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 말이다.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직장 서열을 무시할 만한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직장 생활을 안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 특히나 최상위 직장인이라 하는 대기업 사원보다 돈을 많이 벌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현실은 그런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 관련해서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사업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 이었다. 그리고 돈이 많은 부모님도 기가 막힌 사업아이디어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방황 끝에 내린 결론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내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학교이름 밖에는 없으니까.
그 때부터 꾸준히 보아왔던 영어 시험이다. 영어 시험을 볼 때마다 내가 왜 이걸 공부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내가 무슨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그리고 얼마나 자주 영어를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외래어들 정도는 나도 알아들을 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시험은 내 영어 실력을 얼마나 제대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갖다가도 이내 정신차리자며 내 손으로 내 얼굴의 불쌍한 볼 따귀를 짝짝 때리고 만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저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현실이니까. 필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이미 취업한 선배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인사담당자들의 말 또한 그랬다. 그들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선배들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나도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하고 한숨을 내 뱉었다.
7시 17분. 버스를 타고 스마트폰을 보았다. 다행이 늦지는 않았다. 버스 밖 풍경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나가다 보이는 건물들의 간판에도 어쩔 수 없다는 글이 적혀있는 것만 같다. 어쩔 수 없이 화려하고 밝은 간판들의 모습은 언제나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은 무시하기 일쑤다.
“띵동~ 다음 정류소는….” 내가 시험 보는 곳에 도착했다는 버스 안내 방송이다. 이미 버스 출구에는 나와 같이 어쩔 수 없이 온 것만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있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작게만 보이는 주말. 한 중학교로 그들을 따라 나도 들어갔다. 내가 시험 볼 곳을 학교 건물 입구에 붙여진 커다란 종이의 숫자들을 맞춰보며 시험 볼 교실을 찾아낸다.
나에게는 비교적 작은 책걸상에 앉아서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시험을 감독할 사람이 들어오고 시험이 시작된다. 감독관이 신분증과 그의 손에 들려진 종이를 번갈아 가며 한 명 한 명 확인한다. 아니 무심하게 휙휙 고개만 돌린다.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인다. 회색 종이가 앞에서부터 뒤로 전달된다. 나도 종이를 받았다. 뒤에 앉은 사람에게 종이를 넘겨주고 내 시험지를 바라봤다. 회색 빛 건물 안에서 회색 빛 종이에 인쇄 된 글자를 봤다. 영어는 어디 갔지?? 갸우뚱 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열심히 시험에 몰두하고 있다. 앞에서 시험을 감독하는 사람이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어쩔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영어 시험지를 다른 사람들처럼 영어가 보이는 듯이 끄적끄적 거리고 집중하는 척을 한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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