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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유유백서> - 왕도 배틀 만화론



유유백서

저자
YOSHIHIRO TOGASHI 지음
출판사
대원씨아이 | 2002-04-2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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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 일본 만화를 대표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드래곤볼>이 꽤 압도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드래곤볼>은 일본 만화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지명도와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그 인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드래곤볼>은 그야말로 일본에서 말하는 왕도 배틀 만화의 전형이며 완성형이다. 그 자체적인 만화 퀄리티도 높지만 그와 동시에 특정 장르의 가능성을 거의 극한까지 끌어들인 것으로도 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틀 만화라면 적당히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과연 왕도 만화란 개념은 좀 낯설다. 물론 꽤 최근작인 오바타 타케시와 오바 츠쿠미의 <바쿠만>에서 이 개념을 다뤄주는 바람에 조금 이해하기 편해진 구석도 있다. 왕도(王道)라는 말 그대로 그 개념의 가장 보편적이며 핵심적인 가치를 다루는 작품을 말한다. 대개 소년만화에서 쓰니 만큼, 소년 만화의 기초적인 개념이나 자세등을 작품의 근간으로 삼을 때 왕도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슈에이샤의 가장 인기있는 만화잡지인 소년 점프에서 말하는 3대 슬로건인 우정, 노력, 승리를 생각하면 된다. 인물들이 우정으로 서로를 연대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승리하는 포지티브한 개념의 작품들이 바로 왕도 만화라 할 만하다. 이에 맞서서 사도 만화라는 개념도 있는데, 이것도 간단하다. 왕도 만화가 다루지 않는, 혹은 왕도 만화가 다루는 가치에 반하는 만화들을 말한다. 최근 사도 만화의 가장 좋은 샘플로는 소년 점프에 연재된 <데스 노트>를 든다.

 

결국 왕도 만화란 작품의 구성이나 진행을 다루는 게 아니라, 작품의 방향성과 세계관, 중심적으로 다루는 가치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왕도 만화에는 배틀 만화 뿐만 아니라 스포츠 만화등도 많은 포진을 이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주체적인 장르를 지칭하지 않고 왕도 만화라고 부를 때는 오묘하게 왕도 배틀 만화로 납득하게 된다. 그것은 특별히 심각한 이유는 없다. 대다수의 대표적인 왕도 만화들이 배틀 만화 장르에서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80년대~90년대까지는 왕도 배틀 만화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1979년 연재를 시작한 유데 타마고의 <근육맨>이 도중에 배틀 만화로 장르 변환을 하고 메가 히트를 기록한 이래로 소년 점프가 이런 타입의 만화들을 자주 다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근육맨>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인기가 어느 정도 하락한 타 장르의 만화들을 배틀 만화로 치환시켜서 인기를 유지하는 등의 선택지도 점차 늘어갔다. 물론 애당초부터 배틀만화로써 영상화/상품 기획을 동시에 한 <세인트 세이야> 같은 만화들도 있었기에 배틀 만화의 저변은 점차 상승했다.

 

왕도 배틀 만화가 소년만화의 꽃과 같은 성장을 한 것은 그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일단 컨텐츠 자체가 액션이라는 장르를 품고 있다. 그리고 인기의 많은 부분을 캐릭터의 인기에 기인한다. 캐릭터의 인기는 곧바로 상품적인 소스의 확대로 이어지며, 세일즈로써 굉장한 강점을 지니게 된다. 점차 강해지는 아군과 그에 따라 맞춤형 적이 등장한다는 구조는 큰 틀의 이야기를 세분화하여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작품의 인기를 전반적으로 테스트 하고 작품의 장기적인 유지를 작가에게 종용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드래곤볼>프리저 편에서 인기가 있었기에 셀 편으로 도달 하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정리하자면 왕도 배틀 만화는 작품의 세일즈 적인 측면을 최대한 강화하고, 몇 번이고 상업적인 재고를 할 수 있는 꽤 유리한 장르이기 때문에 장생 할 수 있었다. 물론 배틀 만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액션만화로써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90년대 중후반을 거치자 배틀 만화는 한층 사그러든 맛이 있다. 물론 배틀 만화는 여전히 일본 만화판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년 점프의 주요 인기 코너를 독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행하던 당시에 비하면 그 기세가 위축되었다는 주장은 부인하기 힘들다. 시대가 지나서 트렌드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난하지만, 단순히 수치적인 위축 이외에도 작품이 가지는 아우라 같은 것이 줄어들었다는 느낌이다. 왕도 배틀 만화는 여전히 나오지만,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면 장르의 특성을 내리 답습한 껍데기의 복제 같은 느낌도 든다. 여전히 주인공들은 동료를 모으고, 싸워 나가며, 결국에는 승리하지만 그런 반복적인 습성만 야기하고 있을 뿐 과거의 억척스러운 정신론 같은 것은 썩 발견하기 힘들다.

 

다시 장르의 원점으로 돌아가자. 왕도 배틀 만화는 순수한 만화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순수하며, 순수한 대의를 외친다. 이 장르에서 다루는 기본 가치들 역시 굉장히 순수한 정신적 자세를 말하고 있고, 그것들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어찌되던 처음에 말한대로 동료들과 우정을 쌓고 노력해서 강해지면 승리한다는 개념에 큰 반발이 없다. 악당들은 어찌되던 악당이며, 주인공과 그 동료에 의해서 패배한다. 때로는 그 일부가 주인공의 순수한 대의에 반하여 아군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정리해도 왕도 만화는 그 가치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

 

이런 자세가 작품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려면 그 작품을 만들고 컨트롤 하는 작가의 정신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작가 본인이 우정-노력-승리의 3점 이론을 믿지 않는 채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 결과물은 아무래도 두 종류가 될 것이다. 사도 만화가 되거나, 왕도 배틀 만화의 껍데기만 쓰고 있거나(줄여서 거짓말 하거나’). 그러다보니 요새의 왕도 만화들이 썩 고전적인 풍미를 품지 못하게 된 것도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이다. 요새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 속도와 그 폭이 이전과는 심하게 다르고, 작품을 다루는 작가들마저 쉽사리 작품이 원하는 순수성을 유지하지 못했으리라. 이런 와중에서 왕도 만화로써 자신의 작품을 유지하려면 결국은 왕도 배틀 만화의 진행방식과 틀을 따를지언정 그 알갱이를 기존의 순수함과는 다른, 어떤 것들(대개 자신의 의식)로 채워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의 괴리가 현재의 왕도 만화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있는 전제이지 않나 싶다.

 

토가시 요시히로의 <유유백서>는 이런 이론에 대한 가장 의미있는 샘플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불량학생의 유령 행보를 통해 인간의 인연을 다루던 드라마 만화였던 <유유백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왕도 배틀 만화로 장르 전환을 하게 됐었다. 그리고 정석적인 왕도 배틀 만화의 행보를 걷더니, <죠죠의 기묘한 모험>같은 삐딱한 배틀 만화의 특성을 따라하다가 결국 장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결론을 냈다. <유유백서>는 얼굴이 많은 만화다. 이 만화는 외부에는 왕도 배틀 만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하나의 장르로 규합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의 바탕에는 작가인 토가시 요시히로의 심적인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유유백서>의 초기 연재를 살펴보면 작가인 토가시의 마인드는 꽤 순수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배틀만화가 되지 않았던 초기 연재분은 굉장히 강력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내부에는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인 유령/요괴들과 그들보다 나쁜 인간들이라는 냉랭한 태도도 존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그래도 인간간의 인연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를 지었다. 정말 봐주기도 힘들 정도인 불량학생 유스케가 뭇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아도 실제로는 순수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가진 불합리성 안에서 진짜 순수한 인간미를 발견한다는 구조 또한 그렇다. 이때의 토가시는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을지언정 인간들간의 정은 살아있다라는 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였으니 만화가 배틀 만화로 이행되더라도 자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영계 형사편이 시작하자 적으로는 뚜렷하게 악한이라고 부를만한 요괴들이 등장했으며, 그 안에서도 인간미있는 드라마들이 병행되었다. 쿠라마와 어머니의 에피소드는 전반부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위치에서는 토가시가 가지고 있던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이라는 관점이 거세되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래도 왕도 배틀 만화가 가져야 하는 극단적인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적들은 사악한 요괴로 한정되었고, 인간을 지키는 유스케와 요괴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개념으로만 전개된다.

 

물론 이 관점은 본 작품의 피크라고 할 수 있는 암흑 무투회 편에서 급격하게 깨져나간다. 그 전까지 인간들을 가급적 안전장치 안쪽에서 보존시키던 만화였으나, 점점 인간이 사리사욕을 위해 요괴를 이용한다거나 하는 개념들이 치고 들어온다. 암흑 무투회의 가장 핵심적인 악역을 도구로의 경우는 원래 인간이었으나 극단적인 강함을 추구하여 스스로 요괴가 된 인물로 설정하는 등 얼마 전 까지 보이던 온건한 관점보다는 조금 더 삐뚤어진 방향성을 보여준다. 그 외의 참가자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인간이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캐릭터요괴지만 깨끗한 승부를 원하는 캐릭터등 영계 탐정편에서 보여준 단순성에서 많이 탈피되어있다. 이것을 단순히 보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초기 토가시가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 회귀되었다고 보는게 옳다. 다시 언급하자면 토가시는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이라는 전제를 깔고서 드라마를 전개했었다. 영계 탐정편에서 일시적으로 제거했던 것을 다시 불러들인 것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 안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초기 드라마에서 보여주던 나쁜 사람들은 직관적인 부도덕에 가깝다. 말하자면 착한 여자를 가지고 노는 플레이보이아이를 무단 방치하고 일에 몰두하는 부모등 조금 더 사회적으로 직관적이고 우리의 도덕 안쪽에 있었던 것들을 말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악의는 조금 더 강력한 느낌이 든다. 시작부터 보석을 얻기 위해 요괴 소녀를 계속 고문하는부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뒤로 줄줄, 악인의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인간성을 많이 상실한 인간들이 줄을 잇는다. 반복하자면 도구로는 강해지기 위해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포기하고 요괴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인간이다.

 

이 시점은 토가시의 인간관이 꽤 변해가는 부분이라는 느낌이 든다. 작품의 시작부에서 느낄 수 있듯이 토가시는 인간 사회에 대한 무한정의 애정을 가진 타입은 아니었다. 인간 사회는 원래 작은 악의로 가득하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었고, 그것을 사람간의 인연과 정으로 극복 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에 걸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리고 이 관점은 거의 그대로 암흑 무투회 편까지 이어지지만, 그 안에서 한가지가 달라졌다. ‘인간 사회가 작은 악의로 가득하다에서 인간 사회의 악의는 생각보다 깊고 더럽다정도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승리하는 것은 역시 고전적인 왕도 만화의 법칙에서 찾는다. 결국 유스케는 동료들과의 우정’, 그리고 수련이라는 노력을 통해서 인간을 포기한 도구로와 요괴만도 못한 인간들에게서 승리를 쟁취한다. 하지만 확실히 이 시점에서의 토가시는 기존과 많이 변했다.

 

왕도 만화에 대한 정확한 포기는 일반적으로 센스이 편이라고 부르는 지옥의 문 편에서부터 시작된다. 암흑 무투회편은 최소한 더러운 인간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악의의 저변에 요괴라는 존재를 끼워넣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의 문 편에서의 적은 모두 유스케와 같은 인간이다. 그들 중 일부는 그저 개인의 쾌락을 위해, 일부는 대장격인 센스이의 의견에 찬동하기 때문에 함께 한다. 하지만 이 안에서는 토가시가 기존에 가르던 인간과 요괴의 구도가 완벽하게 탈피되어 있다. 이 탈피와 함께 작품에서 다루던 깨끗함더러움의 개념도 함께 부숴져있다. 토가시가 이 편에서 다루는 인간의 악의는 이전 편들에서 다루던 정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무엇보다 원래 명계탐정 이었던 센스이가 그 지위를 포기하고 지옥의 문을 열려고 하는 이유에서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드러나는 인간은 영생을 얻기 위해 요괴들을 잡아서 생식을 하는, 인간성이라는 궤도에서 완벽하게 탈피한 존재로써 묘사된다.

 


이 시점 부터는 우정, 노력, 승리라는 개념은 <유유백서>의 내부에서 존재할 수가 없다. 이 만화는 이미 순수한 어떤 감상을 다루지 않고, 다룰 마음도 없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인의를 탈피한,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어떤 이들과 그래도 대의에 가까운 주인공들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가 최악의 존재로 더럽혀져 버렸고, 그 안에서 대의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아무리 악행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센스이의 목적은 주인공 유스케의 일행보다 훨씬 순수하다.

 

이렇다보니, 작품의 시작부부터 계속 동일하게 다뤄지던 주인공 유스케도 쉬이 독자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 유스케는 물론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동료들을 지키겠다는 순수한 이상과 동시에 싸움을 즐기는배틀 만화 주인공들의 전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위험한 것은 바로 싸움을 즐기는 행위는 대의로 인해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주인공이 순수한 이상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면 그저 싸움만을 쫓는 투견 같은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토가시는 지옥의 문 편에서 이 개념을 맹목적으로 추적한다. 이 파트에서도 여전히 유스케는 강하지만, 왠지 모르게 무기력해 보인다. 물론 전체적인 작품의 형태가 육체적인 전투 보다는 상대와의 능력을 맞추는 계산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와 동시에 자신이 따르던 순수한 이상에 대한 상실도 있다고 본다. 확실한 건, 지옥의 문 편에서는 센스이가 유스케보다 훨씬 순수하며 이상적이다. 그러니 결국 유스케는 투견으로 남는다.

 

이런 구도는 왕도(이미 <유유백서>는 이 시점에서 사도지만) 배틀 만화의 전형적인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 엎은 상황이다. 왕도 배틀 만화의 주인공들이 그 특유의 호전성과 강렬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등에 업고 있었던 순수함, 그리고 순수성을 유지시켜주는 요소들이었다. 이것들이 거세되고 나면 배틀 만화는 왕도의 틀에서 벗어나고, 주인공들은 옹호받기 곤란한 전문 싸움꾼이 된다. 센스이와 유스케의 싸움이 끝나자 센스이의 파트너인 이츠키는 유스케에게 이런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떠난다. “우리는 이제 질렸다고. 너희들은 또 다른 적을 찾아내서 계속 싸우도록 해.”

 


<유유백서>는 이 뒤로 마강통일편이라는 또다른 큰 에피소드를 맞이하지만 이 편은 완전히 배틀 만화의 틀에서 손을 놓은 토가시의 마음대로 적당한 이야기만 남기고 끝을 맺는다. 이런 토가시의 자세는 당연하다. 그는 이츠키라는 캐릭터의 입을 빌어서 난 질렸어. 너희나 열심히 싸워.”라고 장르의 개념 자체를 부정했으니까. 이 이츠키가 토로한 피로감은 아마도 토가시 본인이 느꼈던 피로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희나 싸워라는 것은 배틀 만화의 주인공인 유스케, 그리고 그와 같은 입장에 놓은 수많은 배틀만화의 주인공들, 더 나아가 출판사의 상업적 목적에 의해서 휘둘리는 수많은 왕도 배틀 만화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편집부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유유백서>가 연재되는 동안 토가시의 사상과 관점 특히 세계관은 크게 변동쳤음을 예측 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은 작품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 <유유백서>의 몇몇 에피소드들이 타락의 코드를 갖추고 있는 만큼, 토가시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순수성이 소멸되어 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드라마 만화에서, 그리고 순수한 왕도 배틀 만화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하지만 애당초, 그리고 작금의 왕도 배틀 만화들이 과연 순수한가? 글쎄, 최소한 그들의 태생을 모두 순수함이라는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힘든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그 껍데기 안에서 순수성을 배제한 채로 연재되는 다른 샘플들도 볼 수 있다. 작가의 순수성의 박탈이 작품내에서 어찌 요동치는지는 이미 토가시 요시히로가 <유유백서>에서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싸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세상을 정복하게 될 때는 아무래도 우정, 노력, 승리를 진심으로 되찾을 때에 가능할 것 같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