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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탑 텐> - 히어로 코믹에 바치는 냉소



탑 텐 Top 10. 1

저자
앨런 무어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3-25 출간
카테고리
만화
책소개
초능력을 가진 경찰과 악당들의 전투가 시작된다!앨런 무어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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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무어의 작품을 보기 전에는 어떤 종류의 기대감이 생긴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인 <V 포 벤데타>나 <왓치맨>에서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풍미다. 앨런 무어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나키즘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파시즘적인(절대로 보통 우리가 일컫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자들에 대한 직설적인 공격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갖다보면 간과하게 되는 것이 있다. 앨런 무어는 정치적인 과객이기 이전에 텍스트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앨런 무어에게서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느끼게 되는 과정의 직전, 그가 만들어 놓은 만화라는 예술적인 라인을 먼저 밟게 된다. 미처 알아채기도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인 인용들과 은유들. 앨런 무어는 아나키스트 이기 이전에 테크니션이다. 

 

<탑 텐>은 앨런 무어의 테크니션으로써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앨런 무어의 대표작들(<V 포 벤데타>, <왓치맨>, <프롬 헬>)을 보고 이 작품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탑 텐>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어둡고 습하기 보다는 과장되고 우스운 이야기이다. 그의 정치적 견지와 강력한 독설은 살풋 제거되어있고, 그 자리에 만화라는 매체 그 자체에 대한 삐딱하고 냉소적인 관점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렇다. 이 만화는 앨런 무어가 '만화'라는 매체에 가지고 있는 시선이 장난끼 넘치게 실려있다고 봐도 좋다.

 

앨런 무어의 또다른 대표작인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이하 젠틀맨 리그)>이 문학 버젼이라면 이 <탑 텐>은 만화 버젼이다. 다만 그 소재를 바라보는 관점은 많이 다르다. <젠틀멘 리그>는 그가 애정을 느끼는 고전 문학들이 한대 어우러져서 시대를 초월하는 멋진 활극을 벌이는데 반해 <탑 텐>은 그가 미국 대중 만화에서 느낀 불온전한 기운들만 모두 모아서 농짓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탑 텐>의 첫인상만 봐도 느낄수 있다. 코스튬과 (미들네임으로 치환된) 가명을 지닌 사람들만 사는 도시, 우악스러운 디자인의 건물과 자동차들로 가득한 이 곳은 그야말로 히피의 천국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남들은 하지 않을 행동을 하는 인물들, 소위 슈퍼 히어로에 대한 무어식의 묘사다. 그는 우리가 히어로 코믹을 보면서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위상에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까발리고 초능력자들로 가득한 도시 하나를 완벽한 히피들의 세계로 둔갑시켰다. 이러한 셋팅 자체가 이미 낄낄 거리고 웃어넘길 냉소적인 한토막의 개그나 다름없다.

 

그리고 작품 내에서는 이러한 시니컬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이곳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은 모두 미국 대중만화라는 코드를 통해서 극과장된 것들로 둔갑한다. 단순한 택시에서부터 시작해서 범죄, 차별, 인간관계, 대중가요 등등. 그 모든것들에 초능력과 초과학이라는 개념이 들어가있는 것. 그리고 이런 만화적인 과장이 가지는 괴리를 여과없이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때로는 너무 집착적이어서 오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자. 우리가 '슈퍼히어로'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매체들에게서 (상업적 가치를 위해) 부여된 멋스러움을 제거하고나면 이 <탑 텐>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그것들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고 하늘을 날던가 광선을 뿜으며 괴상한 행동을 하는 자들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 <탑 텐>이 앨런 무어의 단순한 농담덩어리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미국 만화가 가진 두터운 포장에 대한 비웃음이라고 읽어도 충분하지 않는가.

 

그것을 느끼게 해주는 큰 두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다. 첫째는 더스트 데블의 집에 침입한 울트라 마우스들의 이야기이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울트라 마우스라는 초능력을 가진 쥐들의 침입으로 시작한다. 그 쥐들 역시 코믹북에 등장하는 슈퍼 히어로들처럼 컬러풀한 코스튬을 입고 강력한 초능력으로 서로에게 대적한다. 그리고 전문 업자의 해설에 의하자면 초기에 해치우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초월적인 존재들을 소환하고 차원간 전쟁을 벌이는 등... 여하턴 대단히 귀찮은 일들을 한다고 한다. 바로 '귀찮은 일' 말이다. 우리가 <인피니티니 크라이시스>니 <시크릿 워>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환상적인 이벤트들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단순히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쥐라는 이유로. 그런 매혹적인 대형 이벤트들도 이입이라는 개념을 제거하고나면 집을 침입한 새앙쥐들이 벌이는 짜증나는 퍼레이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는 2권에서 가장 큰 내용을 차지하는 세븐 센티넬즈에 관한 이야기다. 누가봐도 저스티스 리그의 카피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세븐 센티넬즈의 활약은 위에서 적은 그대로 '포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임이 밝혀진다. 게다가 히어로 팀과 사이드킥 팀이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비틀어서 그 포장의 이유까지 만들어낸다. 저스티스 리그를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들의 정체와 그 최후에 폭소와 야유를 느낄것이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이들이 그토록 강력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다름아닌 미디어에 의한 포장이었음을 상기하자. 이것은 코스튬을 입은 초능력자들의 문화가 사실은 히피 문화나 다름없음을 잊게 만드는 어떠한 작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물론 말을 조금 진지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이 과정들은 유머러스하게 흐른다. 하지만 이렇게 웃음을 동반할 수록 그 본의는 날카로워진다. <탑 텐>을 보고 난 후 저스티스 리그의 멤버들을 보게 될때 이 작품내의 촌극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나는 언제가 되던 계속 떠오를것 같다.

 

마지막. 나는 앨런 무어가 이러한 시니컬한 관점으로 만화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드라마를 잊지 않음을 믿고 있다. 항상 무어가 가진 강력한 메시지와 은유들 그리고 서브텍스트에 묻혀서 잊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는 의외로 로맨티스트라는 점이다. 특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이 2권의 최초 에피소드인 '하늘에서'을 보자. 이 에피소드는 <탑 텐>이라는 작품에 귀속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탑 텐>의 안에 있을때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봤던 어떤 캐릭터들의 최후와 함께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 때로는 이야기를 위해서 순식간에 희생되는 그들을 말이다. 이것을 상기시켜주는 무어는 그래도 히어로 코믹이라는 장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탑 텐>의 시즌 1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2권 마지막 장면은 그 무엇보다 로맨틱하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굳이 필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