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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위대한 개츠비


(그림 출처 : http://www.yes24.com/24/Viewer/DetailImageView/3636227)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이 두 번째 문장을 글 전체와 어떻게 연결을 시켜야 할 지 난감했다. 소설의 등장인물 중에서 어느 누구도 위의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굳이 가까운 사람을 찾으려면 개츠비가 아닐까 싶다. 개츠비가 그런 방식으로 자수성가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만 위의 문장을 적용시키려면 억지로 시킬 수 있을지 않을까 싶다. 왜 떳떳하지 못한 사업 내용으로 부자가 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라고 말한다면 무척이나 허무한 일이니 말이다. 그것도 전혀 가치없는 여자를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왜 위대한 지도 모르고 어릴 때 책을 봤었던 기억이 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공감하듯이 이게 왜 명작인지 이해 불가이기 때문이다. 작년 연말 쯤에 독서토론모임에서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꺼꾸로 간다'를 읽으면서 피츠제럴드의 문체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경험도 있었다. 또 그 단편집에 실려있는 다른 단편 혹은 중편소설도 재미가 없어서 다 읽지 못했다. 이런 경험이 합쳐져서 피츠제럴드의 소설에는 눈에 띄는 플롯의 전개가 잘 안보인다는 느낌이 강했다. 혹은 반전이 있더라도 그게 왜 반전인지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런 선입견을 깨뜨린 것이 '위대한 개츠비' 바로 이 책이었다. 내가 자란 문화적 환경은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가치절하할만큼 빈약했구나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개츠비는 이 책의 여자 주인공인 데이지를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남자다. 개츠비가 부자가 된 이유는 그가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서일 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츠비는 왜 데이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데이지는 왜 게츠비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자세한 이유가 나와 있을 턱이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여하튼 내가 그들의 사랑이 단지 외향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을 지은 이유는 서로 사랑에 빠진 나이가 어렸을 때였고 또한 오랫동안 알아오던 사이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이해할 시간도 없이 개츠비는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유럽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후에 다시 만나 사랑에 쉽게 빠지기 된 것도 몇 년 전에 타의에 의해서 끝이 난 사랑의 후유증 때문 혹은 개츠비가 다 가진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개츠비는 왜 맹목적으로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해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난했던 자신의 출신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높은 신분의 여자를 아내로 얻기 위한 허영심으로 변질된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의 끝을 보지 못한 한 남자의 저돌적인 질주인지 말이다. 작품 속에서 묘사된 데이지와 개츠비를 살펴 보면 그들 둘 다 뭔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 닉을 사귀어 가는 과정을 보면 좀 어색한 행동들이 보인다. 그리고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했을 때 개츠비가 많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분명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데이지를 만나기 전에 위축해 있는 그를 볼 때 뭔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들었다. 닉과 계속 비교가 되었기 때문에 개츠비는 서툰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 균형잡힌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짙었다. 데이지 또한 남편 톰과의 관계를 어찌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첫 장면에서 불행해 보이는 데이지가 묘사되는데 그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톰과 갈라서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 배경이 짧은 난 단지 사회적 체면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1920년대는 미국에서는 여자들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대단했던 시기이므로. 또한 개츠비의 저택에 처음 들러서 개츠비의 화려한 셔츠 뭉치를 보고 감동하는 장면이라든지, 후반부에 머틀을 치고 나서 두려움에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작품 내내 그녀의 캐릭터에 대한 실망을 더할 뿐이다. 이런 가치 없는 여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개츠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왜 위대한 개츠비인 것일까? 뭐가 위대하다는 것일까?


  위대하는 의미를 비아냥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후반부에 닉의 태도가 좀 걸리긴 한다. 개츠비가 베풀었던 그 많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개츠비의 장례식 참석을 피하는 듯 한다. 심지어 그의 동업자까지도 말이다. 파티에서 많이 취해있던 한 남자만 장례식장에 찾아서 멀리서 개츠비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에서 피츠제럴드의 시니컬한 문체는 닭살이 생길만큼 쾌감을 주었던 것 같다. 심지어 개츠비를 사랑했다고 말한 데이지도 오지 않는다. 닉은 왜 개츠비 사후에 정성을 쏟았던 것일까? 닉은 의리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이고 또한 데이지를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개츠비에 대한 측은지심이 작용했던 것 같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머틀을 죽인 사람은 데이지인지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유추할만한 장치들은 곳곳에서 보인다. 닉은 개츠비의 말만 듣고 데이지의 말은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 캐릭터의 성향을 볼 때 개츠비의 말이 더 믿음직스럽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대하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 좀 모호해 보인다. 그 당시를 살았던 미국 동부 상류층의 타락을 비꼬는 것은 확실히 맞는데 과연 닉은 개츠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피츠 제럴드가 이 소설을 썼을 때 자기 자신의 두 자아 중 좀 더 세속적인 자아는 개츠비로 그리고 세상을 비판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는 닉으로 표현한 듯한 느낌이다. 


  감상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고민스럽다. 아직 할 이야기가 좀 더 있지만 너무 부산스러운 글이 될까봐 이하 생략도 좋은 것 같다. 개츠비의 번역은 많은 사람들이 했지만 문학동네에서 나온 판이 가장 우수한 번역 작업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소설가 김영하가 번역을 해서인지 읽으면서 글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군데군데에서 했다. 묘사가 자연스러워서 마치 원작이 우리말이 아닐까 싶을 만큼 매끄러웠다. 과거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실망을 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