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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물건 이야기] 그 후

어찌어찌 하다 환경과 생태에 관한 책을 읽는 독서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다. 2011년의 일이다.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모여서 발제하고 이야기하는 형식이었다. 내가 [물건 이야기](애니 레너드 지음, 김승진 옮김, 김영사 펴냄, 2011)를 읽자고 제안했고 그 책이 결정됐는데 덕분에 발제를 맡게 됐다. 막상 책을 읽어 보니 500쪽에 걸쳐 (나름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져서 뭘 넣고 뭘 빼서 요약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책 소개를 하자면, 제목 그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물건'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경이나 자원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책들은 대체로 생산과 폐기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책은 자원 추출, 생산, 유통, 소비, 폐기, 이렇게 다섯 단계를 모두 들여다 본다. 특히 환경과 자원 문제 해결에 있어 사람들의 '소비', 더 구체적으로는 그 뒤에 자리잡은 욕망을 직시하고 다스려야 한다고 보는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거대한 생산 기업과 유통 기업을 비난하고 각성을 촉구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음으로써 (주로 소비자인) 독자에게는 '그래, 난 할 만큼 했어' 하는 면죄부를 주는 책들과 이 책이 가장 크게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였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꽤 고통스러웠다. 어떤 물건이든 앞서 얘기한 다섯 개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음을 끊임없이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친환경' 마크가 붙은 제품을 사고 분리수거 잘 하는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일깨워 줬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책을 소화시킬 정도의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뭐라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괴로워' 하고 멈추면 이 책을 읽은(그리고 애써 발제까지 한) 보람이 없지 않겠나, 그건 좀 아깝다는 생각이었다. 환경 운동에 투신한다거나 캠페인을 벌이는 일은 전문가와 단체에 일단 미루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해 봤다. 의외로 간단히 답이 나왔다. '불필요한 것을 사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에 장을 보러 가면 으레 사는 것들이 몇 있었다. 밥 해 먹기 귀찮거나 시간이 없을 때를 대비한다는 이유로 씨리얼을 샀다. 늦은 밤에 마트를 도느라 피곤한 나를 토닥거리는 의미로 빵을 샀다. 카레나 스파게티 소스 같은 가공식품들도 단골 구입 품목이었다. 수입맥주 6캔을 1만원에 파는 행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더불어 집 밖에선 습관적으로 캔커피를 마셨다. [물건 이야기] 이후 이런 소비가 정말 꼭 필요한 건지 따져보게 됐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안 사도 되는 것들이었다.


[물건 이야기]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것 중 하나가 알루미늄이다. 채굴 과정에서 자연 파괴가 심하고 제련하는 데 엄청난 양의 전기를 소모한다. 그 전기를 대기 위해 근처에 수력 발전소를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환경과 원주민들의 생활 터전의 파괴가 일어난다. 이런 일들을 적은 비용으로 하기 위해 당연히(!) 채굴과 제련은 가난하고 힘 없는 나라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알루미늄으로 음료 캔을 제조해놓고는 그 안에 든 음료를 꼴깍꼴깍 몇 모금 마시고 버린다. (미국에 국한된 이야기인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루미늄 캔의 재활용에도 많은 전기가 필요해 비용이 높다는 이유로 재활용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한다(이건 정말 뜻밖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캔에 든 음료, 즉 캔커피와 캔맥주를 마시지 않기로 했다. 이걸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편의점에 갔을 때 느꼈던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음료 선택의 폭이 확 쪼그라든 것이다. 편의점 냉장고의 대부분을 캔이 채우고 있음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캔을 안 쓰기로 마음을 먹으니 플라스틱 용기도 썩 내키지 않아 유리병에 든 커피와 맥주를 샀다. 그런데 이것들의 가격이 좀 비싼 편이고 들고 다니기에 무거워서 어지간하면 안 사게 됐다. 자연스레 지출이 줄었다. 


씨리얼을 끊었더니 우유나 두유를 살 일도 같이 없어졌다. 돈이 굳는 느낌도 좋았고 분리수거 하느라 종이팩을 씻고 말리고 펼치는 짓을 더 이상 안 해도 됐다. 마트에서 파는 빵을 끊고 내친 김에 과자류도 사지 않기로 했더니 과일이나 감자, 고구마를 살 여유가 생겼다. 카레는 즉석 카레 대신 고형 카레를 사서 만들어 먹는 쪽으로 바꿨고 스파게티 소스도 잘게 썬 토마토에 바질, 오레가노 같은 향신료를 넣어 만들어 먹곤 했다. 노력과 시간은 더 들었지만 조리 과정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고 내 입맛에 맞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다. 그때의 결심들을 지금까지 잘 실천하고 있냐 하면, 부끄럽게도 그렇진 못 하다. 습관으로 굳어져 별 어려움 없이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고 결국 포기한 것도 있다. 그래도 이런 시도 덕택에 삶이 조금 더 간소해졌다. 처음엔 특정 물건을 안 사고 안 먹기 수준었지만 막상 해 보니 거기에서 그쳐지지 않았다.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여러 번 생각하게 됐다. 꼭 필요한 물건인 경우 완제품을 사지 않고 직접 만드는 방법, 덜 사는 방법, 아껴 쓰는 방법을 찾아 보게 됐다. 몇 가지 것들을 직접 만들어 보면서 수공예에도 관심이 생겼다. 삶에서 쓸데없는 물건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여유와 재미가 채우는 느낌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려나.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미션(?)들을 이런저런 핑계로 지키지 못 하고 있고 더 줄일 것은 없는지 궁리하는 것도 게을리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계기로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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