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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회의

6회 <봄날은 간다> 정리

참여해주신 분들 - 밍기뉴님, 와일드윙님, 인생다그렇지님, 친구따라왔어요님, 몽룡이누나님, 조제님

<봄날은 간다> 하면 요새는 '라면 먹고 갈래요?'겠죠. 2001년에 나온 영화가 느닷없이 2013년에 패러디 되어서 유행어를 남기게 되었다 생각하니 좀 감회가 새롭습니다. 사실 이 패러디 이전까지 <봄날은 간다>를 대표하는 대사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였지만요.

이 영화에서의 라면이 요새는 개그 코드가 되어서 좀 우스운 감이 있습니다만, 실은 이 라면이라는 게 단순히 넘어갈 단어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라면이란 오브젝트는 주인공 상우와 은수의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매개체거든요. 특히 두사람간에 슬슬 균열이 일어나던 시점에서 은수는 상우에게 '빨리 들어와서 라면이나 끓여'라고 말하고, 상우는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고 응수하기도 하고요. 라면이란게 어찌보면 이 두사람간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해소해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수도 있습니다.

사실 토론은 라면보다는 주인공 상우의 직업인 사운드 엔지니어부터 접근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상우의 직업에 대한 논제가 딱 떨어진 순간 토론회가 모두 먹먹해진 부분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조금 더 맥을 짚고 접근할 필요가 있음에도 너무 급박한 주제부터 던졌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정리 역시 조금 더 접근성이 용이한 라면부터 해도 괜찮겠다 생각이 듭니다.

라면에 대한 토론회의 의견합치는 아주 빠르게 결정났습니다. 뭐 사실 너무 직관적으로 보이는 코드 아니겠어요? 라면이란 무릇 밥대신 먹는 가볍고 빠른 음식이죠. 끼니를 대신하긴 하지만 밥의 자리를 넘보지는 못하고요. 라면이란 출출할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대용식이예요. 상우가 '내가 라면으로 보여?'라고 한 이유가 아주 뻔하게 잡히죠. 맞습니다. 은수가 상우를 '라면 먹고 갈래?'라고 꼬신 이유는 지금 생각하시는 그게 맞아요. 은수는 라면을 먹는 마음으로 상우를 고른겁니다. 상우를 자신의 주식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던 것이죠. <봄날은 간다>의 해석은 여기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은수와 상우의 관계부터 짚을 필요가 있는것이죠.

이 영화를 처음보면 은수가 그렇게 미워보일수가 없습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상우에게 감정이입 하도록 만들어져 있고요. 상우는 정말 착하고 순수한 남자죠. 그렇게 직설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은 아니예요. 집까지 끌어들인 은수에게 술한잔 하자는 말도 못하고 '무슨 술 좋아해요?'라며 빙 돌려 말하는 참 맥없는 남자죠.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항상 지켜보며 조용히 이해하는 덤덤함이 있습니다. 강하고 듬직한 사람은 아니지만 옆에 있음으로써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절의 풍경소리를 따러 갔던 그때에, 은수를 깨우지 않고 홀로 재빨리 풍경 소리를 담아내고 다음날 장비를 챙겨서 소리도 안내고 졸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알수 있습니다. 그때 그런 상우를 보는 은수의 눈빛이 모든걸 대변해주고 있지요.

그에 반해서 은수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몇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째로 이혼녀 라는 것, 둘째로 적극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 정도죠. 사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상우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도 전혀 알수가 없습니다. 처음 한번을 보면요.

토론회의 양상은 (썸머에 이어) 또다시 은수의 마음을 파보는 논의로 접어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은수의 심상은 그렇게 가시적으로 잘 보이는 편은 아님에도 모두 비슷한 의견을 내고 있었다는 것이죠. 처음 본 사람도, 두번 이상 본 사람도 모두 은수의 마음의 움직임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상우에게 너무 이입해서 그것을 약간 미뤄둔것 아니었나 싶네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은수는 당장의 외로움을 달랠 라면으로 상우를 골랐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가 뒤집어지기 시작했어요. 상우와 한창 데이트를 하던 은수는 길 한복판에 내려서 합장 되어있는 한쌍의 무덤을 봅니다. 그리고 상우에게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묻힐까?'하는 질문을 합니다. 정확하게 어느 시점부터 은수의 마음이 더 강하게 움직였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만, 최소한 이 시점에서 은수는 상우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말이 좀 우습겠지만) 이때 은수에게 상우는 라면이 아니었어요.

토론회는 은수의 어떠한 심적 변동이 이 시점부터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어떠한 마음의 충돌로써 일어났는지는 의견이 분분했지요. 누군가는 현실적인 요건, 상우의 직업의 불안함에 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막상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니 이혼의 상처가 다시 쓰라리기 시작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결국에 은수는 두려웠던것 아닐까요. 은수가 상우에게 접근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었죠. 그런데 이게 자신의 진심까지 파고 들자 어떤 이유가 떠오르던 결국엔 두려웠던 것이라고 보았어요.

한국 영화 악당 1위에 은수가 들어간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기도 하지만, 토론회에서는 누구하나 은수가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음에도 그것이 두려워서 거리를 두게 되는 그 유리같은 심성을 어찌 욕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은수의 마음은 시간이 흐르듯 생기는 자연스러운 불안과 걱정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술을 먹고 한밤중에 들어와 상우에게 애교를 부리며 안겨놓고는, 다음날 아침을 차려놓은 상우에게 냉정하게 구는 모습들로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풀면 상우에게 끌리니까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묶어놓으려고 하고 있잖아요.

상우에게 있어서 이런 은수의 진폭은 상우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상우는 의외로 은수를 잘 이해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상우가 그 어떤 이해를 더 덧댄다고 하더라도 은수의 상처는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었을테죠. 상우에게 있어서 은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움직이는 하나의 흐름에 불가했습니다.

상우가 사운드 엔지니어로 설정 된 것이 아마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운드 엔지니어는 세상의 소리를 담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지는 않아요. 항상 한발짝 떨어져서 마이크를 대고 그 소리를 기록하기만 합니다. 은수의 마음도 마치 흔들리는 갈대처럼 한없이 흔들려 가지만 상우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앞에 마이크를 담고 조용히 기록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두사람의 감정이 변화하는 그 순간에 녹음 작업을 하는 장면을 넣습니다. 둘의 만남에 대밭 소리를 녹음하게 되고, 은수가 상우에게 호감을 느낄때 절의 풍경소리를 담습니다. 은수가 불안을 느끼자 강물 소리를 녹음하다가 노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을 허밍하고요. 은수에 대한 사랑을 확신한 상우는 바닷소리를 녹음하다가 '미워도 다시 한번'을 부릅니다. 그리고 결국 노부부의 노래를 녹음하고 관계의 균열을 맞이하죠. 아마도 이 노부부의 '아라리'는 두사람이 꿈꾸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 곱게 늙은 이 노부부은 이어질듯 끊어질듯 노래를 부르지만 하나의 훌륭한 화음을 만들어 내니까요. 정작 상우와 은수의 노래는 서로 절대 섞이지 않습니다. 둘의 미래를 보이듯이요.

어쩌면 할아버지가 돌아올거라 믿고 한없이 기다리는 할머니야 말로 이 두사람의 미래를 미리 보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의 기록이었던 사진을 가지고 있지요. 사진은 왠지 몇번이고 화면에 비춰집니다. 특히 할머니의 장례를 치룬 후에는 몇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지고요. 이런 기록이 사랑의 기대감과 아련함을 만들어 준다면,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도 그런 기록들을 남기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다시 찾아온 은수를 돌려보낸 상우는 은수의 허밍을 찾아내어 다시 듣기도 하지요.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와는 달랐다고 보입니다. 항상 언제 돌아올까 기다리던 할머니의 신발은 당연하다는 듯 집 밖을 향하고 있었어요. 상우는 조용히 그 신발을 집 안을 향하게 바꿉니다. 할머니의 그 한결같은 사랑을 이해하는 상우이지만 때로는 그냥 보낼 필요도 있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언제나 나갈 준비를 하기 보다는 다시 안을 향해야 한다고 알게 되었을 거예요. 할머니의 유언도 그랬잖아요. '떠난 여자랑 버스는 잡으면 안된다.'고요.

먼저 정리한 <500일의 썸머>는 남녀의 만남을 그리지만 결국 성장담을 말하고 있다고 정리했지요. 공교롭게도 이 <봄날은 간다>도 그렇게 보입니다. 처음 은수가 허밍을 하던 때, 상우는 그저 그것을 은수가 부르는 예쁜 노래라고 생각하고 녹음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상우가 그 노래의 의미를 아는 듯 보여요. 단순히 사랑을 고백하는 예쁜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기쁨은 일시적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하다'고 말한다는 것을 말이죠. 상우는 은수와 만나면서 사랑이 가지는 어떠한 속성들을 천천히 깨달은 것입니다. 이 성장이 있었기에 돌아온 은수를 잡지 않았던 것이고요.

하지만 이 점이 다릅니다. 상우는 어떠한 성숙을 맞이했지만 변화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상우라는 인물이 가진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성장이 꼭 변화를 도모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대밭에서 소리를 녹음하던 상우와 마지막 갈대밭에서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는 그래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저 천천히 아물어갈 작은 상처 하나만 더 생겼을 뿐이고, 그것으로 앞으로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겠지요. 상우에게 있어 하나의 봄날은 갔지만 계절이 돌고 돌 듯 또다른 봄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 <봄날은 간다>인 이유일 것입니다.

- 토론회가 뽑은 명장면 -
밍기뉴님께서 뽑아주신 장면입니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이지요. 
상우라는 인물이 한단계를 넘어 성숙했다는 느낌을 한번에 보여주는 아주 매력적인 장면입니다.

몽룡이누나님께서 뽑아주신 장면입니다.
그 모든 장면이 좋았지만 이 장면이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하셨습니다.
이 장면이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시는군요.

친구따라왔어요님께서 뽑아주신 장면입니다.
나무의 조형이 인상적이라고 하셨습니다. 
한쪽의 가지가 부러진 나무의 모습이 두사람의 앞으로의 감정을 미리 알려주는듯 했다고 하시네요.

인생다그렇지님께서 뽑아주신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차를 긁는 소리가 인상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소리를 주로 다루고 있는 만큼 차를 긁는 소음이 망가진 관계를 보여준다고 느끼셨다네요.
덧붙여 이 긁힌 상처를 은수가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뽑은 장면입니다.
상우에게 '자고갈래요?'하고 물어본 뒤에 수줍게 생라면을 한조각 먹는 은수의 모습입니다.
저는 상우에게 말했던 '자고갈래요?'보다 이 행동이 더 강력한 어필을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제가 뽑은 두번째 장면입니다.
처음 대밭에서 소리를 녹음하는 상우와 은수입니다.
장면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왠지 이 장면 하나로 두 사람의 관계를 미리 알수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토론회의 한줄평 -
(점수는 5점 만점입니다.)
4 : 사랑의 본질
4.5 : 이영애 예쁘다!
4.5 : 조용히 스며드는 영화
4.9 : 봄날은 간다 그리고 또 온다
4.5 : 사랑과 성장에 관한 시적인 영화
4.5 :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 토론회가 추천하는 같이 보면 좋은 작품 -
<우리도 사랑일까> (영화) : 남녀간의 흔들리는 감정에 대해 두 영화와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추> (영화) :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영상이 특징으로, <봄날은 간다>와 일견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연애의 온도> (영화) : 그래도 비교적 잘(?) 헤어지며 끝난 두 영화와 비교해서 다시 만났을때의 지저분함을 느낄 수 있을듯.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영화) : 소소하고 예쁜 영상과 함께 사랑을 반추한다는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