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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명왕성

  교육 연수가 있었다. 총 2.5시간짜리 교육이었는데 요즘 박근혜 정부가 밀고 있는 창조경제의 개념 이해를 위한 강의를 1시간 정도 듣고 있으려니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도망을 쳤다. 난 사춘기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강의는 너무나 짜증난다. 진짜 오랜만에 국민의례를 할 뻔 했다. 아 국민의례를 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해서 왠만하면 피하는 편이다. 예전에 조카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했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내가 너무 어색해서 미치는 것 같았다.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성향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땡땡이를 쳐서 상상마당을 달려갔다. 그 무렵에 하는 영화를 아무거나 봐야지 해서 무작정 갔다. 예상한대로 평일 오후라서 관객이 많이 없었다. 손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냥 지나치다가 "명왕성"이라는 영화를 봐야지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딱 시간이 맞았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세영고에서 벌어지는 1등 그룹의 아이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한 또는 1등을 제거하기 위한 각종 음모가 벌어지는 곳이다. 세영고는 그냥 일반계 고등학교가 아니다. 우리 주인공인 김준은 평균 93점 이상 성적을 얻는데 전교 67등이라는 허망한 등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봐서 자사고 정도 되지 않나 싶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구조에 이 학교에 예전에 방첩활동을 하는 기관의 건물로 쓰여서 학생들만 알고 있는 공간이 따로 있을 정도다. 그 공간은 고문을 위한 유치시설 내지 감옥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뭔가 냄새를 나기 쉬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을 진학재라는 우등반 아이들만 알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답노트를 공유하는 정보공유 그룹인 "토끼 사냥" 일원 4명의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들이 저지르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10등 안에 들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학생들을 꼬셔서 토끼사냥 일원으로 만들어 오답노트를 공유한다는 명목하에 이런 저런 끔직한 일들을 시킨다. 액체 폭탄을 만들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의 차를 파괴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집단에 도전하려는 여학생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놓는다든지 갖가지 방식으로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주변을 각종 음모를 동원해서 손쉽게 정리해버린다. 그런 후 새로들어온 신입이 10등안에 들면 또 다른 학생을 새로운 멤버로 넣고 오답노트로 유혹하며 10등안에 든 학생을 음모에 빠트려 제거해버리는 방식을 쓴다. 둘째, 조직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는 멤버를 제거해 버린다. 여기서는 유진이라는 전교 1등을 제거해 버리해 버리는데 이는 그 전에 전교 1등을 했던 여학생을 제거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방식이다. "토끼사냥" 멤버들은 서로가 친구라는 생각보다 공통의 목표를 가지는 잠재적 경쟁자로 서로를 의식하는 것 같다. 이들이 친구같은 공감대가 전혀 없는 모임이라는 것이 영화 후반에 자세히 드러난다. 우리의 주인공도 음모에 빠지지만 영화후반에 화끈한 방식으로 세상에 그리고 토끼사냥의 멤버들에게 복수를 한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보면서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비워두고 싶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이 토끼 사냥 멤버들이 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문제해결 과정을 보면서 저런 게 진짜 공부인데...... 공부를 하게 되는 동기가 엉뚱하긴 했지만 역설적인 상황에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보면서 많이 가슴이 아팠다. 나도 영화만큼 과장된 형태는 아니지만 비슷한 심정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영화설정과 비슷한 우등반에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는 그 반에 들지 못하였지만 2학기 9월 모의고사 이후에는 그 반에 들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우등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게 위해서 말이다. 그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의 비참한 심정은 느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실제 학교 생활에서는 학생들이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협력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서로 물어가면서 공부를 했고 음모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친구에게 솔직한 모습을 마냥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내 위에 있었던 학생들을 하나씩 제치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낀 적도 많다. 당연히 그런 감정은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난 기쁜데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없는 기쁨이라니...그러면서 그런 친구들과는 조금은 서먹해지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내가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했다. 내가 한 것이 과연 공부였을까? 지금 와서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 공부를 했을까? 남들은 3분만에 푸는 문제는 나는 2분 30초에 풀기 위해서 그런 숙달과정이 필요했을까? 그러면서 기초에는 등한시 하게 되어버렸고 내가 좋아하는 관심사로 뻗어나가는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누가 빨리 정확하게 푸는가에 나를 철저히 맞추어 갔다. 체제에 순응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한다. 그 밖을 보지 못하고 말이다. 영화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화끈하고 강력하게 세상에 자신의 말을 전한다. 비정상적인 경쟁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영화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고 그것도 십대 후반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현실이 저주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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