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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일블리드> - 유쾌한 공포




장르 : 버츄얼 귀신의 집 게임

발매년 : 2001년

기종 : 드림 캐스트

제작사 : 크레이지 게임즈


호러라는 장르가 있다. 문학에서부터 출발해 새로운 미디어가 나올 때 마다 핵심적인 매체로 옷을 갈아입은 재미있는 장르다. 호러는 영상이 등장하자 곧 영상의 세계에 진입했고, 영화로써 독보적인 장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호러 문학은 꾸준히 등장하고 있지만 호러라는 장르를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영화가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호러라는 장르의 특징인데, 호러가 다루고 있는 원천적인 감정이 공포인 탓이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호러라는 장르는 체험자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정확하게는 공포라는 감정이나 공포를 느낄 상황 자체를 소재로 삼는 작품들도 포함하는 장르다. 이를테면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2>같은 영화는 지나치게 웃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호러라는 장르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래도 호러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의 기틀이 공포감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체험자가 이 감정을 온건히 전달받을 수 있을 때 장르로써의 쾌감이 대량 상승하게 된다. 문학에서 영화로, 감각적인 충만함이 확장되자 그 힘이 훨씬 강해진 것도 이런 이유 일 것이다.

 

이러다보니 호러가 게임이라는 미디어에 안착하게 된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공포감이 체험이라는 루트를 통해서 들어올 때 그 파급력이 강해진다면, 게임은 그 이상향적인 매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상황에서 생기는 최대의 적은 기술력이다.

 

<어둠의 씨앗>


호러 장르를 게임에서 재현하려 한 시도는 초기에도 꽤 있었다. 다만 호러의 분위기만을 빌려오고 당대의 게임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거나(<악마성 드라큘라> ), 이야기적으로만 호러 문학의 것을 빌려오거나 (<다크 하프>, <어둠의 씨앗>) 하는 정도였다. id소프트의 <울펜슈타인 3D>가 히트하고 나자, 그 형식인 FPS의 틀을 빌려서 1인칭으로 공포를 시도한 작품들도 꽤 나타났고, 슈팅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1인칭과 어두운 묘사라는 틀을 이용해서 공포를 시도하는 작품들(<울티마 언더월드>)도 곧잘 나타나긴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공포라는 요소를 본래의 게임 포맷에 부가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게임에 있어서 공포의 가장 놀라운 첫 사례를 꼽자면 역시 <어둠 속의 나홀로>를 들 수 있다. 당시로써는 이례적인 3D 그래픽을 대량으로 사용한 게임이다. 장르는 액션 어드벤쳐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저주받은 저택에 들어간 주인공이 저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해결하고 저택에서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기존의 작품과 다른 것은 역시 3D로 만들어진 캐릭터, 그리고 (용량 한계상) 프리-렌더링 되어서 만들어진 2D 스타일의 배경에 있다. 이러한 조건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 하나 1장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고정된 배경 때문에 캐릭터는 고정된 카메라 시점 내에서만 움직이게 되어있다. 이 요소가 독특한 것은 이전까지 대부분의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주인공 캐릭터를 기점으로 화면이 움직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이미 지정된 카메라 시점 안에서 캐릭터가 움직이며, 캐릭터가 그곳에서 표시하기 어려운 공간으로 이동하면 다른 카메라의 시점으로 변경하는 식으로 공간 위주의 표현을 실현하고 있다.


 <어둠속의 나홀로>

이 아무것도 아닌 변화는 생각보다 꽤 효과적인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일단 각각의 공간은 카메라에 의해서 심하게 왜곡된 형태로 보이며, 대체적으로 하이 앵글로 캐릭터를 잡아주고 있다. 이것은 영화 연출에서의 렌즈 왜곡과 부감샷이 주는 효과와 거의 동일하며, 관객의 불안감을 최대한 이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된다. 이런 효과와 함께 캐릭터를 시점안에 가둬두는 듯한화면 전환방식을 사용하자 플레이어는 심각한 폐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자신이 공간의 주체가 아니며, 공간에게 위협을 받고 그렇기에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급격한 정신적 압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나 분위기만이 아닌, 플레이어 본인에게 공포감을 전달한 유효한 케이스다.

 

<어둠속의 나홀로>식 게임 플레이는 <어둠속의 나홀로> 시리즈만이 거의 사용하다가 한동안 명맥이 끊긴다. 그러다가 B급 좀비영화를 소재로한 캡콤의 액션 어드벤쳐 게임인 <바이오 해저드>에서 이 방식이 다시 채용 되며 전세계적인 메가히트를 기록한다. 또한 이 방식이 일종의 유행이 되어서 같은 형태의 게임들이 반복되어서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코나미는 <바이오 해저드>의 형태에서 프리-렌더식 2D 배경을 포기하고 풀-렌더된 3D 배경을 차용한 <사일런트 힐>이라는 작품을 만들며 이 또한 크게 히트한다. 그리고 이 두 시리즈는 지금까지도 호러 게임 시리즈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게임업계의 센세이션 규모로 따지면 <어둠속의 나홀로><바이오 해저드>에 크게 뒤떨어지지는 않았었다. 그럼에도 <바이오 해저드>는 동서양을 막론한 메가히트와 동시에 많은 아류작들까지 만들어냈으며, 그 안에서 일부 유수의 작품들도 등장하는 호러 게임의 컨벤션같은 작품이 되었다. 이것은 <어둠속의 나홀로>가 등장했을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 분명하다.


 <바이오 해저드>


바로 이 배경에 기술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둠속의 나홀로>가 등장한 시절은 리얼타임 3D 캐릭터를 구현하는 기술이 일반적이지 못했으며, 사실 본편에 사용된 그것도 심하게 조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3D 기술이 일반적인 기술이 되고, 게임의 제작에 능히 필수로 사용되는 시대가 오자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이것을 호러 게임의 계보따위와 치환해서 보자면 결국 호러게임이 성립하는데 있어서 기술의 가치가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튼, 아직 <바이오 해저드> 쇼크가 가시지 않은 그 시대에는 많은 아류작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범작이상의 작품들도 존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차별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게임들이 <바이오 해저드> (혹은 <사일런트 힐>)과 크게 차이 없는 조작계, 맵 구성, 퍼즐요소 따위를 다량으로 부착하고 그 이야기만 교체하여서 등장하곤 하였던 것이다. 결국 많은 작품들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졌다. 똑같은 모습이라면 퀄리티 있는 것 혹은 네임밸류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소비층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안에서 자체적으로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트렌드에 치중하지 않은 색다른 선택이 필요했다.

 

2001, 세가가 주력으로 밀고 있던 콘솔 드림 캐스트로 발매된 <일블리드>는 이런 상황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일블리드>는 공포라는 감정을 잃어버린 주인공 에리코가 개장직전의 대형 귀신의 집 어트렉션인 일블리드의 초대장을 받아 체험해본다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리고 게임의 구성은 이 설정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게임은 유원지 같은 형태의 큰 공간에 몇 개의 어트렉션 시어터(소위 말하는 귀신의 집)이 존재하며 이 시어터들이 각각 1개의 스테이지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장르명도 이에 걸맞게 버츄얼 귀신의 집 게임이라는 독특한 장르명이 붙어있기도 하다.

 

장르명과 설정, 구성이 이렇듯 이 게임은 애당초부터 <바이오 해저드> 스타일 게임들과 공포감의 목적을 달리한다. <바이오 해저드> 스타일 게임들이 <어둠속의 나홀로>에서 계승받아 폐쇄공간에서의 압박감과 그 안에서의 탈출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일블리드>는 자신의 발로 직접 공포의 공간에 뛰어들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호러적 이벤트를 쾌감적으로 즐기게 된다. <일블리드>는 각각의 스테이지에 입장하지만 클리어와 동시에 탈출하고 그 다음에 또다시 다른 스테이지로 입장하는 플레이어의 자발적인 행위로 진행되는 것이다. 또한 상기 표시한대로 본 작품은 호러적 이벤트를 쾌감적으로 즐기게 유도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리 파악해서 유유자적하게 넘어가는 등 플레이어가 공포라는 개념을 유쾌하게 다루도록 유도하고 있다.


<일블리드>의 게임화면. 상단에 4개의 감각을 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바이오 해저드>에서 가장 공포적인 이벤트인 조용한 복도의 창문을 갑자기 뚫고 들어오는 좀비견이라는 이벤트는 게임 내 플래그에 의해서 단순히 벌어지며, 플레이어는 공간적 압박감과 긴장감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깜짝 놀라게 된다. 또한 이 급작스러운 이벤트로 인해 플레이어의 반사신경도 일순 둔해지며 덕분에 좀비견을 물리칠 때에 큰 심리적 압박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일블리드>에서는 캐릭터에게 시각, 청각, 후각, 6감이라는 4개의 감각을 부여하고, 이와같은 깜놀이벤트의 위치에 다가갈수록 감각 패러미터가 민감해져서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뻔뻔스러움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런 이벤트가 한 스테이지에도 수십개씩 배치되어 있다보니 플레이어로써는 앞으로 벌어질 호러 이벤트들이 어떤 형태일지에 대한 기대감과 그로인해 생기는 결과를 유쾌하게 바라보게 된다.

 

게다가 게임 내 준비되어 있는 특수 아이템인 호러 모니터를 사용하면 이런 이벤트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할 수 있으며, 자신의 아드레날린(!)을 일정 사용함으로써 미리 이벤트의 위치를 예측 회피할 수도 있도록 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이 게임의 진행은 바로 이 이벤트 위치의 파악과 파훼를 통해 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캐릭터의 감각에 반응은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소위 페이크 스팟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측할 수 있는이벤트들이 산재하는 <일블리드>는 공포의 체험이라는 공포 게임의 코드에 어떻게 부합하고 있을까? 결국 새로운 요소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게임 시스템을 통한 체험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 있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일블리드>는 애당초부터 1차원적인 목표를 부정하고 있었다. ‘공포감을 직선적으로 전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공포라는 소재에 대한 유쾌한 해석, B급 영화적인 정신나간 아이디어들, 수많은 영화의 패러디들을 통해서 공포라는 개념으로 함께 즐기자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애당초 호러 모니터를 통한 공포 스팟의 발견과 파훼라는 개념은 레벨 디자이너가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선택했을 법한 장소를 추리하는 대결적인 관점이다. 결국 플레이어와 디자이너간의 누가 누가 더 잘 놀래키나승부라고 봐도 무관하다. 이러다보니 대체 뭐가 나올까 덜덜 떨기보다는 어디 한번 무섭게 만들어 보시지?’하는 쿨한 태도로 게임을 접하게 만들며, 이게 바로 당시 유행하던 <바이오 해저드> 계열 게임과는 완전히 결별하는 태도의 발현이다.

 

어찌보면 이런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트렌드가 생기고 유행으로 변모하게 되면, 그것을 따라서 많은 아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아류들 중에서 진흙 속의 진주같은 결과물을 찾기란 쉬운 것이 아니게 되고, 그러다보니 하나하나를 접하게 될 때는 진지하지 않게 쿨한 태도로 접하게 된다. <바이오 해저드>가 유행하고 비슷한 호러 어드벤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런 게임을 대하던 플레이어들은 처음에는 즐거워했지만 점차 비슷한 조작계와 패턴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나오는 게임들마다 어디한번?’이라는 냉소적인 마인드로 게임을 잡게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일블리드>가 공포를 잃은 주인공 캐릭터를 배치하고, 여러개의 스테이지당 다른 이야기로 진행되게 구성했으며, 각각의 스테이지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스팟들을 찾아서 해결하는 진행을 부여한 것과 비교하자면 그럴싸하게 들어맞지 않을까?

 

어찌되던 이런 쿨하면서도 유쾌한 태도 덕분에 <일블리드>는 꽤 재미있는 요소들을 많이 갖추게 되었다. 제작자가 부여하는 공포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그들의 생각을 읽고 자신의 손으로 부숴나가며, 때로는 찾아내지 못한 호러 이벤트에 뒷통수를 맞는 기분이 드는 미묘한 재미 말이다. 비록 이 게임의 이야기는 다른 여타 명작들처럼 깊이있는 이야기를 다루지도 않고, 기술적으로도 당대의 게임들에 비해서 그리 대단치는 않다. 하지만 유행에 의해 범람하는, 진보없는 세계에서 이채로운 선택과 그에 걸맞는 구성을 만들어낸 것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이제는 <령 제로><사이렌>, <데드 스페이스>같은 시리즈물이나 <앨런 웨이크>, <디멘토>, <암네시아>같은 명품 호러 게임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이다. 그래도 한때 <일블리드>처럼 도전적이고 반골적인 게임이 하나 쯤 있었다는 걸 기억해 주는 것도 손해보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