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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반짝이는 눈

내 주먹이 녀석의 볼에 정확하게 맞았다. 주먹이 조금 얼얼했지만 참을 만하다. 녀석은 여전히 사나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얀 눈밭에 붉은 피가 섞인 침을 뱉고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그렇게 몇 번을 주먹과 발길질을 주고 받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나도 그리고 그 녀석도.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옆 반 거짓말쟁이 녀석의 말을 듣고 와서 시비를 거는 녀석을 보며 억울하다 말했지만 녀석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3년을 보아온 나보다 한달 전에 이름을 알게 된 옆 반 거짓말쟁이의 말을 믿는 저 녀석이 내 친구였다는 것도 분하다. 그래서 울고 싶을 정도로 아픈데 억지로 꾹 참는다. 싸움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굳이 정하지 않았지만 그건 우리들의 불문율이다.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될 것 같다.

 

결국 녀석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내 맘껏 때리기만 하면 된다. 녀석은 몸을 움츠렸다. 이제 나는 녀석에게 따지면서 녀석의 잘못을 하나 하나 말하면서 분풀이를 하면 된다. 내 화가 풀릴 때까지.

 

끝났다. 더 이상 힘들어서 때리는 것도 지쳤다. 녀석의 옷에는 내 옷에 뭍은 신발자국 보다 많은 신발 자국이 남아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은 녀석이 눈물을 보이는 순간 내 편이 되어 녀석을 비난했다. 구경하던 아이들이 내가 다 때리고 나자 녀석을 때리려고 한다.

 

멈춰. 저 새끼 때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한 대라도 저 새끼 때리면, 그 새끼는 나한테 죽는다.”

 

아이들이 수긍한다는 듯이 녀석에게 욕만 지껄인다. 비겁하다. 아마 내가 녀석에게 졌으면 나한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듯이 나를 때렸을 놈들이다. 재수없다. 내가 한 말이 있으니 아이들은 녀석을 건들지 않을 것이다. 던져놓았던 가방을 들었다. 구경하던 아이들 중 몇 명이 내 뒤를 따라온다.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녀석의 욕을 한다.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떨쳐내고 혼자 걷는다. 눈이 제법 쌓여서 눈을 밟을 때 마다 소리가 난다. 여느 때 같으면 녀석이랑 같이 욕이 반 섞인 말을 주고 받으며 미친 듯이 웃으며 걸었을 길이다. 배신자 녀석 떠올리기 싫지만 자꾸 생각난다. 하얀 눈밭에 피 섞인 침을 연신 뱉으면서 걸어간다.

 

힘들어서 눈 밭에 누웠다. 몸이 반쯤 묻히는 것 같다.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아까 녀석을 때리면서 다 풀릴 것 같은 감정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녀석 욕을 혼자서 내뱉고 만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 한 후에 한 짓이다. 그 와중에 미친놈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지기는 싫었으니까. 한 참을 욕을 하고 울었다. 아무도 안보니까 괜찮다.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친구라 믿었는데,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가방을 던졌다.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또 싸움질이냐며 소리만 고래고래 지른다. 더 이상 날 때리지 않는다. 언제였지? 얼마 전부터 싸우고 온 날이면 날 때리지 않기 시작했다. 아마 날 때리던 아버지의 손을 잡았던 날부터였던 것 같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음악을 크게 틀어버리면 끝날 일이니까.

 

커다란 음악 사이로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머리만 어지럽고 귀찮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집안을 살펴봤다. 쓰러졌다. 아버지가. 작은 일에도 항상 나를 때리던 그 사람이 쓰러졌다. 숨을 쉬는 것인가? 모르겠다. 전화. 전화는 어디있지? 전화기를 찾았다. 119. 눌러야된다. 119는 어떻게 누르지? . 그래 119번을 누르면 되는 거지. 사람이 쓰러졌다고 말했다. 빨리 응급차 좀 보내달라고 말했다. 뭐야 이게.

 

잠에서 깼다. 오래 전 기억이다. 좀 처럼 잊기 싫은 그날의 장면. 그 녀석은 왜 나랑 싸웠던 거지? 아직까지 녀석과 연락을 할 수 없다. 그날 이후로 녀석과 나는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뭔가 기운이 안 좋다.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답답하다. 베게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푹 젖어있었다. 찝찝한 기분이다. 한숨이 나온다. 창문을 열었다.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그날 봤던 눈이다. 그날 눈은 유난히도 반짝였는데, 지금 내리는 눈도 유난히 반짝인다. 주변이 깜깜하다. 크게 숨 한 번 몰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