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목요일

[끄적끼적] 하루성찰 - 4

오늘의 주제는 <갱생의 유무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에 있다>

기말고사도 끝났다! 자습시간만 잔뜩인 요즘. 짝이 심심하다면서 책을 빌려왔는데 심리학에 관련된 책이었다.

그림도 삽입되어있고 중간중간 만화도 있어서 이해하기 쉬운 심리학. 게다가 표지에는 흥미롭게도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써져있었다.

짝이 결국 엎드려 자기 시작할 때 슬쩍 끄집어내서 읽어봤는데 음, 꽤나 나와 비슷한 유형이 많았다.

물론 그 책에서 나온 것보다는 훨씬 강도도 약하고 좀 더 복합적으로 여러 성격이 섞여있긴 했지만 그 중 부정적인 사람이 나와 매우 비슷했다.

행복이란 있지 않고 부정적인 것들을 미리 생각해둬야 나중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원리.

다른 부분도 많았지만 사고방식이 나와 유사했기에 꽤나 주의깊게 살펴봤는데 나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쳐버리게 만들 정도로 부정적이진 않고 그런 얘기도 입 밖에 잘 안내니까.

마침 짝도 잠에서 깨어 얘가 나와 성격이 좀 비슷하다느니하며 뒷자리에 앉은 애들과 서로 네가 민폐끼치는 성격이네 아니네 하며 아웅다웅거리길래 나는 농담식으로 웃으면서 물었다.

 

"야. 나 좀 부정적이냐? 얘랑 나랑 좀 비슷해."

 

그리고 뒤이어 돌아온 대답들은 나를 놀라게 했다.

한 친구는 너는 가까운 미래는 무척 부정적인데 먼 미래는 엄청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며 나를 놀렸고 나도 그에 맞춰 웃으며 장난쳤는데 다른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는 긍정으로 부정을 숨기는 느낌이야. 꽤 부정적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나는 왜 남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 아이의 대답은 내 성격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어찌보면 나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긍정으로 부정을 숨긴다. 그래,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야, 어려운 말 쓰지마! 하면서 장난을 쳐댔지만 속으로는 온갖 가시를 세우고 경계하고 있었다.

난 무척 모순적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차리고 다독거려줬으면 하다가도 그 누구도 진정한 내 모습을 알게 하고 싶진 않다.

집에서 그 장면을 되새김질 하던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내가 부정적인 이유는 뭘까?

 

간단하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냉소적인 원인을 알아내려면 내 유년기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모든 기억을 헤집어봐야한다.

모든 가설을 세우고 그에 대입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살펴봐야한다.

냉소의 원인을 알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사람들이 행복한 원인은 쉽다. 배우자, 친구, 가족 셋 중 하나에 만족했거나 다른 마음 붙일 곳을 찾았거나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 만족했을 때.

그러나 사람들이 부정적인 이유? 그건 너무나 다양하다. 1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슬프거나 우울한 이유는 10가지고 100명이라면 100가지다.

배우자와의 이혼, 빚더미, 사채업자, 친구와의 절교, 왕따, 사춘기인 딸, 나 자신의 문제……. 말하자면 끝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더 이상 진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벽에 가로막힌 느낌.

'다른 사람들은 필요없어. 내가 부정적인 원인을 찾자. 오직 나만의 원인.'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소용 없었다.

 

나는 포기하고 게임실황을 보려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게임실황이란 다른 사람이 게임을 하면서 적절히 농담을 하거나 상황에 따라 반응을 하는 것을 녹화해놓은 동영상인데 나는 요즘 그에 빠져있다.)

그리고 공포게임을 녹화해놓은 동영상을 켰다. 그리고 나는 그 동영상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게임의 내용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써놓은 일기조각을 찾아다니면서 여자아이의 비밀을 알게 되는 심리적 공포게임.

여자아이의 비밀은 엄마, 아빠, 한 때 좋아했던 사람을 죽였다는 것.

그러나 여자아이는 엄마, 아빠의 인색한 칭찬에 상처받아 나름대로 어여쁨 받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는데 죽어버렸고 좋아했던 사람도 그녀에게서 도망치자 무서워져 죽인……흔히 말하는 사연있는 범죄자다.

주인공은 여기서 여자아이와 함께 있을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다른 선택지에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주인공을 학대하고 무섭게 압박했던 여자아이는 주인공이 말없이 포옹해준 행동 한 번에 울면서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감옥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갱생은 나오지 않지만 마지막에는 나와 함께 있어주는 네가 있어서 좋다는 여자아이의 미소로 마무리.

 

자신의 죗값을 치루지 않고 찜찜하게 끝난 것은 불만족스럽지만 나는 그 여자아이를 보면서 과거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친구에게 "나 나빠?"하면서 계속 물었던 내 모습.

나는 부모님께 허구헌날 쌍욕이 섞인 폭언을 들은 중학생이었고 당시의 나는 내가 정말 나쁘다는 결론에 이르렀었다.

내가 나쁘니까 모두가 날 사랑해주지 않는거겠지. 그렇지만 의지했던 그 친구에게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물을 때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더 이상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게 된 나는 매일 "네가 왜 나빠.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이렇게 착한데. 너는 착해." 라며 잠들 때까지 혼잣말을 했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잠들기 전에 계속해서 보기도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어렸다. 내가 그럴 때마다 왜 우는지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나는 그 실황을 보면서 내가 왜 그 때 울었는지 알게 되었다.

갱생해줄 사람이 없어서다.

부정적인 사람, 우울한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그 사람을 갱생시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지켜봐줄 사람이 필요하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착하다고 다독여줄, 그것도 아니면 말없이 안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을 다독이면서 스스로를 갱생시켜 성장한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아니었다. 나는 스스로 착하다며 최면을 걸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읊조리는 동영상도 수천번은 보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울함도 모자라 긍정으로 부정을 숨기는 단계에 이르렀다.

내가 말했을 것이다. 혀는 치킨을 뜯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다고. 손이나 혀는 갱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말캉한 살덩어리가 갱생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지금쯤 행복전도사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갱생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침묵이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저 위에 떡하니 넌 착해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고 적혀있으니까.

나는 그런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기 전, 잠시 망설이는 그 순간의 침묵. 그것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음과 음 사이에도 침묵이 있다. 그런 침묵들이 만들어서 음악이 된다.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도 그와 같다.

말 그 자체가 아니라, 위로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망설이는 침묵. 또는 미처 말 못하고 끌어안은 뒤의 침묵. 그 침묵 자체가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착해.'라고 말해주는 그런 침묵.

그런 침묵들이 모여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런 침묵들은 내가 사랑받고 있으며 누군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나는 여지껏 나에게 이런 침묵을 선사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난 천하의 쌍년인데 '굿 윌 헌팅'의 명장면은 무조건 네 잘못이 아니라면서 우기고 있고 난 착하다며 자위해도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방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는데 자위해봤자 찌질해보일 뿐이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하기 위해 침묵하는 사람이 없어 나는 울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부럽고 내가 찌질하고 불쌍해서.

 

자. 내가 운 이유를 알아냈다. 내가 갱생을 하려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도 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난 왜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대려고만 하지?

이것이 내가 부정적인 이유다. 나의 삶이 긍정으로 부정을 덮는 것으로 뒤범벅된 이유다.

아예 만날 수 없다고 체념하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지도 않게 되고 반포기 상태로 살 수 있어 편하다. 긍정으로 부정을 숨겨야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준다.

 

산다는 건 곧 죽어가는 거라고 13살 때 깨달았다. 거의 6년이 지났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스쳐지나가는 사랑이나 우정, 신뢰같은 것들도 헛수고고 자아성찰해봤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좌절하기만 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게 사람 아니던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최고의 살아가는 방식이 아예 체념한 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니 진짜 우울하다.

운명의 여신이 나를 위해 마련해놓은 죽음이 조금이나마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미 체념했지만.

'목요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세상 모든 건 나이를 먹지  (2) 2014.01.09
2013.12.28.의 스케치  (2) 2014.01.02
22일 민주노총 사무실에는 무슨일이 있었나?  (2) 2013.12.26
[끄적끼적] 인생계산  (6) 2013.12.20
찬란한 빛을 기대했었다  (0) 2013.12.19